당신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을까

by 신하영



9.jpg 8월의 크리스마스



그녀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비 오는 금요일 저녁. 3-9번 버스에 올라타며 나는 사랑을 떠올렸다. 오토바이를 탈 수도 있었겠지만 버스만큼 아늑하고 그리워하기 좋은 곳도 없다. 광동슈퍼와 천일상회 그리고 명성 이발관을 차례대로 지나면 한적한 공원이 나오고 우리가 자주 걷던 아스팔트 길이 나온다. 흰 머리띠를 하고 단정한 옷차림처럼 티끌 하나 없는 미소를 짓던 여자. 뭐가 그리 재밌는지 설익은 농담에도 흰 치아를 만개하고 단 것을 좋아해 이것저것을 챙겨 오면 그 작고 예쁜 입으로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생전 간식 하나 먹지 않던 내가 거무튀튀하고 인공 냄새나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게 된 것도 아마 당신을 만나고 나서부터 일 거다. 그러고 보면 저녁을 먹고 냉장고 위칸을 여는 행위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초저녁의 버스는 나직이도 굴러간다. 이 동네가 이리도 세세했던가. 시야를 맑게 하려 창문을 여니 샛바람이 기분 좋게 들어왔다. 늦겨울이 오면 함께 들판에 가기로 했었는데. 우린 마지막까지 존댓말을 쓰며 서로를 존중했었는데. 당신과 헤어질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토록 사랑하게 될지도 몰랐었던 나다. 하지만 너무나 사랑해서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있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나면서도 매일 배우고 싸우며 위태로운 정신을 잡기 위해 사진기를 들었다. 검은 천 가운데 나무의자를 놓고 그대의 이름을 부른다. 프레임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던 당신은 초록숲의 순록이었고 바다의 인어였다. 그 맑은 눈동자와 입꼬리가 올라갈 때 볼에 새겨지는 주름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황홀했던 시간은 셔터를 누르기 직전이었지만 사진을 벽 한구석에 걸었을 때는 이미 당신은 떠나가고 없어 지옥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왜 헤어진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감정의 무게가 달랐는지, 시간이 어긋났는지 아니면 오해와 타이밍 때문인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런 걸 보면 나는 분명 환각 같은, 것에 빠져있었음에 분명했다. 사랑은 마약이었던가. 어떻게 그 사람 하나 남기고 모든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지, 해야 할 일들을 너무나 많이 놓쳐 몇 달 간은 저금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곧 내릴 때가 온다. 버스에서 내리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소설에서 벗어나 퀴퀴한 일상을 보내야 한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집으로 가면 오래된 진미채와 김치, 된장찌개 같은 걸로 저녁을 때우고 딱딱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사진을 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달을 빛 삼아 당신에게 편지를 쓰겠지. 아, 아, 지독하다. 하지만 언젠가 당신이 소나기처럼 나타날 것 같아 이 구애를 멈출 수가 없다. 이건 분명 고통이지만 나에겐 유일한 희망이자 행복이다. 사랑은 이토록 불가피한 것인가.

당신.

그러니까 당신아. 당신이 내게 준 것들은 심히 맑은 것들이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어요. 내 털 끝 하나 건들지 않을 테니 여기 와서 당신의 것을 좀 가져가세요. 그때 내 사과하리다. 무엇이 됐든 내가 잘못했고 내가 잘할 테니 우리 얼굴 한 번만 봅시다. 오토바이를 타고 저 멀리 있는 들판에 갑시다. 거기서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흘려가며 까르르 웃음을 짓고 오래된 버드나무 아래에서 사진도 찍읍시다. 그리고 손을 잡아요. 풀밭에 앉아 달이 고개를 숙일 때까지 시답잖은 대화를 합시다. 할 얘기가 참 많아요. 나는 그날을 위해 매일을 준비할게요. 잘 못 했어요. 보고 싶어요. 잘 못 했어요 내가.



15.jpg 이별 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