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소설> - 인연 사거리

by 신하영























AM 2:57





오늘도 역시 취한다.
확실히 술이 약해진 게 분명해.

나는 마지막 잔을 쥐고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고개를 들었다.
다들 반쯤 감긴 눈으로 핸드폰을 만지거나 테이블에 얼굴을 박은 채로 있다.


'에, 녀석들 취했나 보네.'


홀로 맑은술을 목으로 넘긴다.


아아,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오늘도 우리는 짙은 한숨을 안주삼아 많은 술병을 비워냈다.


이 정도면 됐다. 재밌었으니까.
기분 좋게 잘 수 있겠다.





.





취한 녀석들을 겨우 집으로 보내고
난 여기, 집으로 가는 사거리에 혼자 서있다.


저녁에 비가 온 탓인지
새벽안개가 도로 위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낮에 그리 많던 차들도 집으로 가 푹 자고 있나 보다.


여기 이곳
사거리
난 혼자 신호를 기다린다.
술내음이 가득한 짙은 한숨을 쉬어내고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알려준 노래를 들을 셈이다.
이만큼 센티하여질 땐
그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이 나의 극복 방법이다.

선이 꼬여 잘 풀리지 않는다.

한참을 풀고 귀에 꼽으니 파란불이 반짝이고 있다.


'아, 놓쳤다.'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저기, 반대편에 한 여자가 노란 우산을 든 채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긴 생머리에 코발트블루색 원피스


무단 횡단을 하려 했지만 하기 싫어졌다.

신호가 바뀌고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곳 사거리에는 그녀와 나 둘밖에 없다.
그녀와 점점 가까워질 땐 고개를 숙였다.
지금 난 취해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갔을 때 고개를 들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남은 보도를 마저 걷는다.
한 발 두 발



그때였다.




"저기요."




미세하게 들렸지만 이 사거리에는 그녀와 나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난 얼른 오른쪽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긴 생머리에 코발트블루 색 원피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한 여자가




이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다.




바로 이곳
인연 사거리에서 말이다.


















인연 사거리













.








나이는 27살
이름은 서혜주
평범한 회사원
취미는 혼자 영화보기, 강아지 산책하기



놀이터에서 처음으로 얻은 그녀에 대한 정보다.



그녀는 날 불러 세웠고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잊을 수 있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당황했지만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어
차분히 그녀를 사거리 밖으로 데리고 와 물었다.




"네?"


"죄송해요. 제가 미쳤나 봐요 잠시."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아, 아니요.

그냥 잊고 싶어서요."


"남자친구 분을요?"


"네."


"언제 헤어지셨는데요?"


"한 달 전에요."




그녀는 어깨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고
얼굴에 묻은 잔머리를 정리했다.




'역시 이별이구나'


그래서 물었다.




"초면에 이런 질문은 좀 그렇지만

차이셨나요?"



"차였죠."



"그럼 원망스럽겠네요."


"네."


"그 마음 저도 알아요.
차인 건 난데 왜 헤어지고 난 뒤에서까지 내가 더 아파해야 하는지.
그 사람은 모를 거잖아요."


"그래서 너무 억울해요.
억울한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흠. 그래서 오늘도 술을 마신 거겠죠."


"맞아요. 저 괜찮았어요.
사실 정말 괜찮은데 문득 이런 순간이 찾아오는 게 너무 싫어요."


"아.. 네.

그래서 전 마침 그 사람이 알려준 노래를 듣고 있었어요.
저도 이제 한 달인데 이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생각날 때 생각하고 한숨 푹 쉬고
그러면 다음 날 전 다시 보통으로 돌아와요. 왜냐하면 이별을 또 실감했으니깐요.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걸 계속 상기시키는 거죠."


"전 못해요 절대."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랍니다."


"근데 그 사람은 왜 헤어지자 했대요?"




그녀가 팔짱을 끼며 내게 물었다.





"어... 음.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좀 걸으면서 얘기할래요?
아, 만약 집이 같은 방향 이라면요.
전 광안리 쪽인데 불편하시면 안 그러셔도 돼요."


"아, 저도 그쪽 방향이긴 해요.
저 같은 미친 여자 처음 보실 텐데. 되게 태연하시네요."


"동질감이 느껴져서요."




그녀는 쿡 하고 웃었고
우리는 새벽의 거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낯선 여자와의 대화였지만

고조된 술기운과 조용한 새벽길 덕분에

어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린 많은 얘길 나눴다.
실제로 연애 속에서 느낀 이질감과
이별 후에 바스러진 수많은 감정의 조각들에 대해.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사람은 때로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녀와 내가 그랬다.

적어도 그때의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음에 분명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






근처 놀이터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시계를 보니 4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정말이지, 엄청난 대화였다.



"그래서 전 말했죠.
내가 이기적인 거면 말을 해 라고요.
근데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래요."


"그럼 뭐래요?"


"이기적인 것보다 심한
자기를 무시하는 거래요."


"아.. 이런."


"당연히 싸울 수밖에 없는 패턴인 거 알겠죠?"


"어지럽네요 정말. "



"싸움을 피하려 해도. 피하는 것 때문에 더 싸우곤 했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X에 대한 욕이 대부분이었지만

X였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제일 열정적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



만약 연애에 갑과 을이 있다면

우린 을 이었고 이별이라는 감정의 추에 짓눌러 있음에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남은 추억을 짜내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받아내며



그녀는 '그'가 무척 보고 싶을 것이다.



나도 안다.



보고 싶고. 그렇지만 볼 수 없는 현실이니

더 미워하려는 마음



물론 X의 정말 나쁜 부분과

이해 못 할 행동도 있었지만

어차피 사랑 앞에선 다 무용지물 아니었던가



그걸 알기에

그녀의 말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 후회할 거예요."



"누구나 그렇게 위로해주죠."



"아녜요. 피부도 엄청 좋으시고 되게 맑아보시는데."



"말이라도 고마워요.

근데 그쪽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요."



"아, 저는 26살이에요.
이름은 한재림이고요."


" 저는 27살이고 이름은 서혜주예요."


"제가 동생이었네요."


"그러게 재림 씨."



라고 말한 뒤 그녀는 크게 웃었다.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반말하셔도 돼요."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아. 그럼 하시는 일은 어떻게 되세요?"


"저는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냥 아무 말도 필요 없는 평범한 직장
재림 씨는 어때요?"


"저는 여행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사실 취직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아직 적응하는 단계거든요."


"금방 적응될 거예요.

근데 재림 씨 술 다 깼죠?"


"저는 완전 맨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도요."


"이제 슬슬 갈까요? 이러다 새소리 듣겠어요."


"그래요. 얼른 가요

저 때문에 괜히 늦으셨네요.



"아이 아닙니다. 괜찮아요."



"전 이쪽으로 가면 되는데."


"저는 도로가 나가서 택시 타면 금방 도착해요."


"다행이네요.

아무튼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한결 낫네요."



"저야말로 한결 낫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저는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




우리는 손을 흔들고

서로를 등지며 걸었다.



나는 다시 걷는다.

그녀가 알려준 노래를 들으며



스산한 순간이다.



2시간 남짓이었지만

누군가와 이렇게 열정적으로 대화해본 적은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보고 싶다.






아아

그녀의 연락처는 물어보지 않았다.

물론 사심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 또한 마찬가지 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얘길 했고

상처를 나눴을 뿐이다.


오늘 서로에게 약이 되었으면

오늘은 그걸로 족한다.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 수도.








그녀가 한 말이 기억난다.





"만약에 운명이 기적이라면 인연은 운과 타이밍이에요.

일상을 보내다 보면 많은 만남의 순간이 있잖아요?

잘 캐치해서 만난 대도

타이밍과 운이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죠.

어느 한 명이 진심이라도 말이에요.

정말 인연은 자석 같은 거예요.

시간이 지나도, 서로의 사이에 수많은 장애물이 있어도

결국 만나는 사람은 만나거든요.

어떻게 보면 어렵죠?

우리가 지내는 한순간 한순간 때문에 인생이 바뀌고 있는데.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인연은 바뀌고 있을 테니깐요.


그러고 보면 만남이라는 게 참 어려워요.

기나긴 추억을 묻고 다시 새로운 것들을 만드는 것도

나는 마음의 준비가 돼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내가 누군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 사랑받는 것도


서로 마음이 맞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인연이자 운명일 수도 있어요.


이렇게 어려운데 앞으로는 어쩐담.."












인연이면 우린 다시 만나겠죠

혜주 씨





















인연 사거리

















p.s


문득 구름을 보다 보면 예쁘다는 생각을 하는데

전 그때마다 당신을 생각하곤 합니다.

아, 좋은 밤바람이 불어도요.


정답이 없는 건 알고 있습니다.

짧았지만 주변에 잔가지들이 많았던 연이었지요.




용기

다시 한 번

아픔

생각




전 아무것도 모르겠다만

당신 생각이 궁금하기도 하고.



어쨌든



인연은 바람처럼 불어오지만

돌처럼 무거운 것이라

들지 못하면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더라고요.


적어도 저한텐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연사거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있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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