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만 쉬고 가실래요?
다시 여름이 왔어 소녀야
바다에 유리 조각이 뿌려졌다.
출렁이는 파도 사이에 자잘 자잘한 빛들이 보여
기억나지? 네가 좋아하던 여름의 바다였는데.
이렇게
멀리서 바다를 보는데 너무나 맑아서
그만 또 생각나고 말았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에겐 구름같던 시간들이 말이야.
.
낯선 곳
여행
작은 마을
미지근한 바람
바다
소녀
.
안녕 소녀야
어때 요즘은?
사계절이 지나 다시 여름이 왔어
이번 여름 또한 덥다.
그 종이부채 아직 가지고 있는 거 아니지?
바람도 별로 안부는 걸 넌 에어컨보다 시원하다면서 고집을 피웠었는데
아참
얼마 전엔 더운 탓에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5개나 먹었는데
그만 배탈이 났지 뭐야
마트에서 우유맛 아이스크림을 많이 샀어
내 핸드폰에 그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고 있는
아리따운 소녀의 사진이 있거든
.
하늘이 맑아
넌 이맘때쯤이면 밀짚모자를 직접 만들고 싶다 했잖아.
난 쓸데없다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더라고
너의 연하늘 색 원피스에는 하얀 모자가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지나가다 하나 사버렸는데
지금 와서 다시 널 보자 하니
난 너무 멀리 와버렸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써
어떻게 모자는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
어쩌다가 널 만나게 된 건지
그때 여자친구가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지
있었다면 그런 푸른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까 싶어
사실 가을에도 겨울에도 그곳이 생각났는 걸
봄에는 여름이 코앞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버틸 수 있었지만
막상 여름이 되니 더 힘든 것 같이 느껴지더라고
왤까?
아마 내 여름날의 블루를
추억으로 느끼고 있어서 그럴 거야
간접적인 게 원래 좀 고통스럽잖아?
.
난 잘 지내고 있어.
말했듯이 난 어디서든 절대 기죽지 않아
그런 나에게 너는 거짓말.이라고 말했지만
맞아. 거짓말이라 해서 내가 더욱 신경 쓰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러니깐 지난 1년 동안 나름 잘 버텨냈어.
넌 좀 어때?
갓난아기였던 동생은 걸음마를 하고
네가 키우는 상추들은 잘 키워서 먹었어?
생각난다.
평상에 앉아 네가 구워졌던 고기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맛이야.
슈퍼 할머니는 잘 지내시지?
점심을 먹고 항상 그 우유맛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갔었는데 말이야
할머니가 우리 어울린다고 결혼하라 하셨을 때
넌 할머니한테 매연 냄새나는 남자는 싫다면서
먼저 저만치 걸어가곤 했었어.
왜 뒷모습만 보여줬는지
글쎄, 혹시나 생각해봤는데
발그레해진 볼을 숨기려 하진 않았는지.
숨길 수 없는 웃음을 보이기 싫었던 건지
그런 막연한 생각 덕분에
한참을 바보처럼 웃었어.
.
소녀야
넌 구름에 이름을 붙여주는 걸 재밌어했었지.
오늘 나의 하루에도 예쁜 구름들이 많아
그래서 다 소녀라고 말해버려
어쩌겠어 생각나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아직 너만큼의 순수한 작명은 무리인가 봐
우리 다시 본다면 먼저 하늘부터 바라보자
어떤 말이 나올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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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맑은 것이 그리워
네 말대로 난 매연냄새나는 퀴퀴한 도시 사람 인 걸
그래서 투명한 바다가 더 그리운지 몰라
물론 네가 그리운 걸 돌려 말하는 거겠지만
나 잊은 거 아니지?
나름 좋은 기억을 함께 나눴다 생각하는데
넌 어땠는지 몰라
답장을 기다리고 쓰는 건 아니야
그저 이번 여름에도 내가 그곳에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서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는데
1년 전 너의 모습과 널 감싸고 있던 것들이 너무 생생히 기억이 나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싶을 정도로
보고 싶다 소녀야
거긴 여전하겠지
만약 너에게로 간다면
네 옆에 서서 "걷자."라고 속삭이고
새하얀 손을 잡고 초록색 오솔길을 걸을 거야
너는 코를 높이 올려 맑은 공기를 마시고
그러다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지겠지
그걸 잡는 나는 놀래 동그랗게 커진 너의 눈을 보며
웃음을 터트릴 거야
아름다운 것들이야 죄다
너의 미소
어느 가사를 인용하면 넌 푸른 바람을 타고 살며시 내게 다가온 바람 같은 존재야
.
다시 그곳에 수만 개의 별이 찾아올 때면
우린 서로가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별을 샐지도 몰라.
재잘되던 네가 조용히 새근새근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난 그제야 밤하늘에 너를 그리고 눈을 감을 거야.
아침에 일어나면 넌 벌써 사라지고 없지
분명 어딘가를 산책하고 있을 거야
무심하기도 해
날 깨워서 같이 가도 되지만 맑은 공기는 너만 마실 거라며 매번 혼자 동산으로 떠났잖아.
날씨가 좋아 바다에 갈 때면
항상 자그마한 손거울로 바다를 비추곤 했어.
그리고 그 거울 속에 비친 바다의 조각을 가지고 싶다 했었지
난 멀리서 그것을 지켜봐
바닷바람이 불면 네가 더 예뻐 보였거든
말했듯 넌 바람과 어울리는 여자니까
해맑게 모래를 얼러 만질 땐
6살
뜨거운지도 모르고 바위에 올라서서 두 팔을 벌려 바다를 끌어안을 땐
10살
파도와 함께 여름에 스며들 때
16살
오후 4시
옅어진 햇볕에 머리를 말릴 때
21살
어둑해진 밤에 더욱 빛나는 콧방울이 보일 때
24살
내 곁에 안겨 숨소리만 들려줄 때
그리고 먼저 잠에 빠져든 내 머리를 한참 만져줬을 때
넌 내게
순수한 아이와 성숙한 여자의 모습을 다 보여주었어
그것도 내 여름 안에서 말이지
맑디 맑은 너
조금 젖은 원피스를 입고 집으로 돌아가는 너의 모습을 볼 땐
이게 사랑인가 싶기도 했어
소녀야
그때 고백하지 못한 건
난 떠나야만 하니까
난 지난 내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를 품에 안고 삶을 버틸 수 있다는 걸 몰랐는데
너라는 바람이 내게 불어오고
난 일상에서 벗어날 때마다 널 그리워하고 있어.
그토록 바랐던 여름이 왔다.
마음껏 널 생각하기엔 햇빛은 너무 뜨겁구나
우리가 다시 보게 된다면
넌 무슨 표정을 지을까?
저기 저 바다 위로 흐르는 추억들을 벗 삼아
멈추지 않은 이야기를 꿈꾸어 봐
너의 노래가 듣고 싶구나
나의 여름아
내 여름안의 블루야
p.s
남자는 펜을 놓고 서둘러 가방을 둘러멨다.
언제든지 떠날 채비는 되어있던 것이다.
그저 지나간 추억에 불과할까 봐.
그래서 용기를 내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마지막 문장을 적을 때
그의 귓속엔 이슬 같은 소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명분이다.
소녀가 부른 노래는
여름날의 블루라는 노래였다.
떠나지 못함은 곧 어리석음과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