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절 인연입니다.

사랑과 종교

by 신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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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연인


애인은 지독한 불교신자였다. 언제부터 종교생활을 했냐고 물으니 이년 전 이별을 한 직후부터라고 했다. 이별과 종교라. 이 두 단어만 들어도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시절 인연이라고 했다. 시절 인연. 인연이라는 말에 미소를 지었지만 그 말이 인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인연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섭섭한 마음에 차갑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튿날, 내게 묻더라. 왜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냐고. 나는 시절 인연을 찾아보니 이런 뜻이더라. 그래서 우리 관계도 그냥 순리대로 가다 헤어지는 거냐며 침을 튀기며 말했다. 못났기도 하지.

그녀는 맞은 침을 소매로 닦으며 푸스스 웃기만 한다. 그러곤 유치원 교사 같은 목소리로 그런 뜻이 아니라며 차분히 나를 달랬다. 싸우고 싶다. 싸우고 싶어. 나는 벌써부터 이별을 생각하는 그녀가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이런 마음을 굳이 표현하니 자연스레 대화는 길어졌고 다음날 출근임에도 불구하고 근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염통 꼬치와 서비스로 나오는 어묵탕에 소주잔을 비워낸다. 나는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여는 애인에게 시절 인연을 믿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의 인연은 불가항적인 면이 있고. 무슨 짓을 해도 흘러가는 순리를 거역할 순 없고. 다 내가 상처를 받았기에 너를 만날 수 있었고. 누구든 영원히 무언갈 소유할 순 없고. 그래서 시절 인연이라는 걸 믿으면 조금 더 편하게 사랑할 수 있다고. 그렇게 되면 이별 따위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관계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내용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정말이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더 이상의 토는 달 수 없었다. 완벽하게 나를 이긴 그녀가 너무나도 현명해 보여 도려 내 쪽에서 사과를 했을 정도니까. 사실, 부정적인 건 오히려 내 놈이었다. 혼자 위태위태해서는. 그녀가 얼마나 안정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표정만 찡그리다니. 얼굴이 빨개지는 건 술 탓이었지만 사실은 부끄러운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어쨌든. 어쨌든. 하던 말 계속해봐 자기야.


"그러니까, 누군가가 간다고 하면 안녕히 가세요. 조심히 가세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보냄의 미학도 필요한 것 같아."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옛 이별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러고 보니 헤어짐에 앞서 사람이길 포기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없었으면 내 앞의 그녀도 만나지 못했을 거다. 끔찍해. 그때 상처 받길 잘했다고 생각하니 묵은 마음이 쑥, 하고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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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할 거잖아?"

"당연하지. 나랑 헤어지고 싶어?"

"절대."

"그럼 똑같은 마음이네. 화 풀어."

"아까 풀렸어. 이거만 마시고 갈까? 내일 출근해야지."

"그래. 주말에 진탕 마시자 자기야."

"응."


꽃샘추위가 어깨를 펴고 있는 밤. 우리는 손만 꾸욱 잡은 채 조용한 밤거리를 걷는다.

우리는 시절 인연. 어찌 됐든 지금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사랑을 하는 것은 분명하기에 그걸로 됐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시절 인연이고 서로를 진실이 사랑하고 있으니.

옆을 돌아보니 애인의 오뚝한 코와 머리카락이 보인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마 질색할 게 분명했다.

날씨가 조금 풀린 밤이라 걷기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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