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감정은 활화산과 같다
나도 성난 사람이야
사실 누구에게나 내면의 화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에 따라 얼굴색이 달라지는 거 아니겠나. 누군가에게 화를 내본 적이 언제인가 생각해 보면 미로를 타고 까마득하게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홀로 삭히며 살고 있는 것이다. 운전대를 잡으면 나는 대니와 에이미가 된다. 약간의 경적만 울려도 이를 악물고 핸들을 부여잡는 나. 조급하게 끼어드는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싶지 않지만 코로 숨을 한 번 들이마시면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게 된다. (비상 깜빡이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건 뭐람)
도로 위의 경적소리를 듣다 보면 우리 모두가 에미미와 대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화를 내면 못난 사람이 되는 사회에서 우리의 분노는 정말이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 아닐까.
"행복해지기 왜 이렇게 어렵지?"
"혼자가 아니길 바랐을 뿐인데"
치열한 복수전 끝에서 지쳐 내뱉는 대사. 열정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다 서사가 있기 마련이다. 그저 잘 살고 싶은 마음에 달렸을 뿐인데 돌아오는 건 실패와 외로움, 괴리감이니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인생이 본래 불행의 연속이라니 곪은 화가 터지면 우린 이성이라고는 일절 볼 수 없는 짐승이 된다. 무지막지하게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무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화는 화를 낳고 그 화는 복수와 불행을 잉태하여 삶을 조금씩 부식시킨다. 그렇게 폐허가 된 일상을 보면 깊은 슬픔에 젖는다. 정말 제대로 살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이 지경에 도달하니 개탄스럽고 눈물이 나는 것이다.
BEEF를 보며 느끼는 건 '화'를 잘 풀어야 한다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겐 솔직함과 기댈 나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허물없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모든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 자유를 찾았다. 진작에 이런 대화를 할걸. 인생이 참 덧없지 같은 말을 내뱉으며 홀가분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존재가 있는가. 대화의 부재를 느끼는 요즘, 외로움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모든 이야기를 꺼낼 솔직함이 있는지 되물어본다. 아무렴, 삶을 이해받고 먼저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말을 못 하겠나. 때론 강해 보이는 사람이 제일 나약한 존재인 것 같다. 강한 척하는 나도 약한 사람이겠지. 나의 분노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내 모든 개소리를 이해해 줄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