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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팡 Mar 30. 2022

위치

수학 에세이

좌표를 찍다

로맹 가리는 말했다. 반짝이는 별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도 밤이 되면 별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있다. 별들의 웅성거림을 듣기 위해. 아니면 이를 빌미로 한 마디 더 속삭이기 위해. 저기 저 별 보여? 무슨 별? 저기 왼쪽에 제일 반짝이는 거 말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절대 애인과, 같이, 같은 별을 볼 수 없다. 서로 다른 별을 보면서 교감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위치를 정확히 설명해야 한다. 어떻게? 잘 알려진 방법이 있다. 북극성을 쳐다보자. 그대로 고개를 숙여 정면을 바라보자. 그러면 눈길의 끝에 북점이 있다. 이제 한다. 특정한 별을 바라보기 위해 북점을 향한 상태에서 몸을 얼마나 돌려야 하는지를. 고개는 얼마나 치켜들어야 하는지를. 이 두 가지 정보에 따라 몸과 고개를 돌리면 누구든 같은 별을 쳐다볼 수 있다. 무수한 별들 가운데 같은 별을 함께 바라보다니! 별의 '좌표'를 전달한 기적 없이가능한 일이다.


좌표란 이처럼 무언가의 위치를 몇 개의 정보로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질문. 위치는 좌표로만 표현되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주소도 위치를 나타내지만, 그리하여 주소를 공유하는 것을 ‘좌표를 찍는다’고도 하지만, 사실 주소와 좌표는 다르다. 유튜브를 보려 웹페이지 주소를 입력할 때, 택배 배송을 위한 집주소를 쓸 때, 보고서를 보내며 이메일 주소를 적을 때 우리가 쓰는 주소는 장소의 이름이다. 정확히 말하면, 주소는 어떤 고정된 장소에 할당되어 있는 이름이다. 주소는 이름이기에 좌표에 비해 자유로움이 있다. 예를 들어, 문상 기자의 이메일 주소 ‘cultureland@bdns.co.kr'은 영화관 좌석의 좌표 'A열 7번’ 보다 개성적이다. 반면, 좌표는 질서정연하다. 질서를 부여하는 주체는 좌표의 축, 그리고 원점이다.


은 공간의 차원을 구성하는 재료다. 가령, 물리 공간은 가로, 세로, 높이, 3개의 축을 세워 3차원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축은 저마다 특정 정보를 준다. 무엇을 관찰하느냐에 따라 필요한 축의 종류와 개수는 달라진다. 비둘기의 속도를 분석하는 과학자는 4개의 축(가로, 세로, 높이, 시간)에 따라 그 움직임을 4차원 구조로 파악한다. 비리 의혹을 받는 정치인을 조사하는 기자는 6개의 축(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에 의해 사건의 이해관계를 6차원적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축이 담는 정보는 수치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각각의 정보를 종합하면 무언가의 구체적인 (물리적, 정치적, …) 위치가 특정된다. 이 측면, 저 측면 뜯어 보면서 대상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다는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좌표적이다.


한편, 원점은 모든 축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축은 어떻게 봐도 아무것도 특별할 게 없는 점에서 교차한다. 따라서 원점에는 아무것도 없다. 원점에 할당될 수 있는 수는 0뿐이다. “0. 제로.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응시하는 이 텅 빈 허공처럼 완벽하게 깨끗하게 텅 비어 있다.” 김사과의 소설 <0, 영, zero, 零> 속 문장이 묘사하듯이, 원점은 비어있는 곳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제거된 과거를 나타낼 때 종종 원점의 비유를 사용한다. 이때 원점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때로는 새출발의 장소를 뜻한다. 영화 <접속>에서 동현이 낮은 목소리로, 그냥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뿐이야, 라고 말할 때 그건 시간을 뒤로 돌려 다른 인연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이다. 텅 빈 곳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장소일 때도 있다.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첫 장면을 보자. 갑작스런 지진에 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수십년 간 모은 수천 종의 어류 표본이 박살나고 이름표가 뒤섞인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그는 실과 바늘을 꺼내 침착하게 눈 앞에 나뒹구는 물고기와 이름표를 엮기 시작한다. 보통 사람은 아니다.


좌표계는 원점을 중심으로 상대적 위치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어느 곳을 원점으로 정해야 할까? 좌표계에서 먼저 시선이 향하는 곳은 원점이다. 그리고 건축가 유현준에 따르면 시선이 모이는 공간에는 권력이 생긴다. 따라서 현실 공간에서 원점을 정하는 문제는 아주 정치적이다. 시선의 권력을 갖기 위한 기싸움은 세계지도의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세계지도는 위도와 경도에 따라 그려지는데, 특히 경도를 정하는 일은 골치아픈 문제였다. 자국의 수도를 경도 0인 점(경도 영점)으로 하여 세계지도를 그리는 경우가 많아지자, 19세기 말 여러 나라의 대표들이 모여 만국 공통의 경도 원점을 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누군가 모든 나라에 중립적인 경도 영점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미국에서온 날아온 한 학자가 말했다. 그런 소리는 “신화이자 환상이자 한 편의 시입니다.”*. 한 영국 과학자는 경도 영점을 정하는 일은 “사업상의 협정”을 하는 것이지 과학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논쟁 끝에 경도 영점은 당시 경제적으로 앞서 있던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로 정해졌다. 원점은 텅 비어 있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힘이 세야 다.


축과 원점을 정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한 번 정해지고 나면 공간에 질서를 준다. 주의해야 할 것은, 축과 원점이 공간 그자체를 변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축을 세우든 어디에 원점을 잡든 공간은 그대로 있다. 좌표계는 그저 ‘해석’의 도구일 뿐이다. 15세기 경 이를 눈치챈 사람이 있었다.


수학에서의 좌표

좌표공간

좌표평면에는 x축과 y축 두 개의 선이 수직으로 놓여 있다. 축에는 눈금이 겨져 있어, 눈금에 적힌 숫자로 평면 위에 놓인 점의 위치를 지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x축과 y축에 새겨진 값(x값, y값)이 모두 1점의 좌표는 (1,1) 표현할 수 있다. 좌표평면에는 점이 아주 많다. 좌표가 (1,1)인 점 외에도 좌표가 (2,2)인 점도 있고, (0.1,0.1)인 점도 있다. 계속해서 x값과 y값이 같은 점들을 찾아볼까나. 하나 하나 나열한다면 이 작업에 끝이 없을테지만, 수식을 적는다면 점들을 한 방에 모을 수 있다. 즉 y=x라는 주문을 외우면 x값과 y값이 같은 모든 점들이 나타난다. 이처럼 '수식'을 이용해서 좌표평면 위의 수많은 점들 가운데 특정 관계를 만족하는 '점들의 모임'을 불러낼 수 있다. 어라, 그런데 유클리드 이래로 점들의 모임이란 도형을 뜻하는 말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좌표평면은 수식과 도형이 만나는 곳이다. 아주 오랫동안 수식을 연구하는 대수학과 도형을 연구하는 기하학은 별개의 수학이었다. 그러나 좌표 개념이 발달하며 대통합의 시대가 열렸다.


빨간 직선 위 점의 좌표는 모두 y=x를 만족한다. x^2 +y^2=10을 만족하는 점을 모두 모으면 파란 원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시대에 수학자들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 첫째, 수학자들은 풀리지 않던 도형 문제를 수식을 통해 해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로 주어진 정육면체 두배 부피의 정육면체를 작도하는 방법을 찾는 문제는 한참 동안 풀리지 않은 도형 난제였다. 19세기에 수학자 피에르 방첼은 이 문제를 삼차방정식 문제로 바꿔 해결했다. 둘째, 수학자들은 좌표평면에 축을 마구 추가해 '좌표공간'을 만들고 3차원을 넘어서는 도형의 모델을 찾을 수 있었다. 아니, 4차원 도형, 5차원 도형이란 게 있긴 한가? 물론 우리가 사는 물리 공간은 3차원이므로 이런 도형의 외관을 종이에 그릴 수는 없다. 하지만 새 시대에는 더 이상 그림이 도형을 연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다. 식으로 도형을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많은 수학자는 표현되는 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도 도형을 연구한다. 그리고 이제니가 쓴 시 <초다면체의 시간>의 한 구절을 중얼거린다. "어제저녁 나는 팔차원 초다면체를 아홉 개나 찾아냈어요."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들은 '벡터'라는 개념을 발명해서 좌표를 새롭게 해석한다. 좌표는 장소만을 지칭하는 도구가 아니다. 좌표는 때로 이동을 나타낸다.


벡터공간

영화관 C열 2번 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저 곳’은 의자가 놓인 고정된 장소인가, 아니면 저 사람이 슬금슬금 움직이다 앉은 도착점인가. ‘장소’와 ‘이동의 결과’는 위치를 보는 아주 다른 관점이다. 장소는 정적인 개념이지만 이동은 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벡터는 이동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다시 말해, 위치를 동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벡터의 관점에서 ‘저 곳’은 ‘기준점에서 저 곳까지의 이동’을 줄인 말이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들은 점 O에서 오른쪽으로 한 칸, 위로 두 칸 떨어진 점 A가 있을 때, 벡터 OA에 대해 OA=(1,2)와 같은 식을 세운다. 점O에서 점A까지의 이동은 ‘오른쪽으로 한 칸, 위로 두 칸 이동’과 같다는 뜻이다. 즉 여기서 좌표 (1,2)는 장소가 아니라 이동을 가리킨다.


물리학자들이 위치를 해석할 때 이동의 관점을 택한 속사정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연산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은 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연산을 좋아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의미있는 연산만을 좋아한다. 장소와 장소의 덧셈? 말이 되지 않는다.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반면, 이동과 이동의 덧셈은 말이 된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이동과 [대전에서 부산]까지의 이동을 더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이동이 된다는 설명은 꽤나 자연스럽다. 또한 이동은 늘리거나 줄이거나 방향을 반대로 바꿀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이동의 절반 또는 두 배에 해당하는 이동을 생각하는 것은 쉽다. 반대로, 장소의 위치를 늘리거나 줄인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여러 이동을 더하고, 방정식을 세우고, 미분하며 물리학자들은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 관계를 아주 정확하게 기술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됐다. 이건 물체의 장소만 설명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벡터가 선형대수학(linear algebra)에서 쓰이면 더 이상 물리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벡터는 아주 추상적인 개념이며, 벡터로 나타낼 수 있는 대상은 물리 공간 속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는 피타고라스가 만물의 근원이라고까지 말한 '수'조차도 벡터로 표현된다. 가령, 복소수 1+2i를 (1,2)로, -2+3i을 (-2,3)으로 써보자. 이런 식으로 모든 복소수는 벡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모든 복소수를 모으면 2차원 '벡터 공간'이 만들어진다. 즉 복소수는 2차원이다. 이처럼 벡터 개념을 이용하면 '수'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피타고라스는 틀렸고 벡터는 수보다도 근원적인 게 아닐까? 참고로 수학자 이인석은 한 선형대수학 교과서에, 벡터 공간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다, 라고 써놨다. 학생들이 어떤 수학적 대상을 보더라도 잊지말고 벡터 공간을 떠올려야 할 정도로 벡터 공간은 근본 개념이라는 뜻이다. 한편, 벡터 공간은 다른 의미에서 이 수학자에게 고향과 같을 것이다. 너무 많은 수학을 공부한 그에게 대학 전공 수학 첫 학기에 배우는 벡터 공간은 마음의 고향이 아닐리 없다.


데카르트를 좌표 위에

좌표 개념은 병약한 데카르트가 침대에 누워 천장 위를 이동하는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방법을 생각하다 탄생했다는 설이 있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 개념을 떠올렸다는 이야기만큼이나 사실인지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왜 좌표 위에 올라간 것은 데카르트가 아니라 파리인가. 나무에서 사과 대신 뉴턴이 떨어질 수도 있는 것처럼, 데카르트 역시 좌표에 놓일 수 있다. 주변 대상을 관찰하기 위해서만 좌표를 사용하는 것은 이 멋진 도구를 절반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셈이다. 때로 우리는 직접 좌표 위에 올라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피터 갤리슨, 2017)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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