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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팡 Sep 13. 2022

우연

수학 에세이

얼마 전, 오랜만의 휴일을 맞아 한 해변을 찾았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은 부드러운 모래와 험한 언덕이 있는 곳이다.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큰 파도에 맞춰 서핑을 하고 있었고, 나는 해먹에 누워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던 중 무언가 반짝이는 느낌이 들었다. 둘러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파도에 휩쓸려 온 듯한 유리병이 보였다. 호기심에 나는 가까이 다가가 병을 주워들었다. 그 안에는 섬세한 필체로 적힌 편지가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며!


이 편지에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행운이 전달되길 바라며 편지를 썼습니다만, 편지를 쓴 데에는 다른 목적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길 바랐습니다. 당신은 어쩌다 이 행운의 편지를 읽게 된 것입니까? 아마 휴일에 하필 바다를 찾았고, 어느 순간 편지가 담긴 병이 눈에 띄었고 하는 몇 가지 우연이 교차한 덕분에 편지를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왜 이 우연들이 발생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연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연인 것이니까요.


혹시 당신이 우연을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신, 모든 일이 벌어지는 데는 다 확실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지도요. 임현의 소설 <엿보는 손>의 한 인물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대부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일 뿐, 알고 나면 뚜렷한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 우연이란 아직 모르거나 그중 한 부분이 누락된 것일 뿐이고.”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우연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아직 모르는 ‘필연’입니다. 모든 일은 다른 일이 원인이 되어 발생했다는 것이지요. 그럼 극단적으로 생각했을 때, 모든 일의 원인은 백몇십억년 전 빅뱅이 발생하며 우주의 모든 물질이 쏟아져 나왔을 때 이미 결정되었겠네요? 우리의 지식이 계속해서 쌓이면 이 궁극의 원인을 이해할 날이 올까요? 글쎄요. 지식이 늘어나면 더 많은 일의 원인이 밝혀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젠가 모든 의 원인이 밝혀지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이 편지에서만큼은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가정해도 당신이 아직 우연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원인 이면에는 운명이나 신의 뜻 같은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요. 따라서 신의 눈과 입을 빌린다면 우연이 왜 발생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면요. 이 또한 우연이 아닌 필연을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과학자 뉴턴도 신비한 힘에 의존해 필연성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모든 사물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한다고, 즉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사물들이 왜 서로를 끌어당기는지 궁금해했죠.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나요? 지금 이순간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푸틴과 김정은도 끌어당기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도대체 왜..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처음 발표했을 때는 이 법칙의 원인에 대한 질문을 거부했습니다. 이 법칙이 "여러 운동들을 잘 설명하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니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자"라면서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는 인력의 원인을 미지의 상태로 남겨두는 게 찝찝했는지, 한 책에 그 설명을 적어놓습니다. 만유인력은 물리학과 기하학에 능통한 신의 설계에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우주는 신이 만든 과학 법칙에 따른 필연의 우주다, 이렇게요.


신비한 힘으로 현상의 원인을 설명하는 일은 옛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21세기 사람들도 21세기의 스타일로 신비한 힘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언택트 타로 운세를 보고 AI 역술인 추천 서비스를 이용하는 식으로 말이죠. 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신비한 힘으로 현상의 원인을 설명하길 원할까요? 불안한 미래를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내게 닥친 불행의 원인이 궁금해서? 뭐, 이유가 어느 한가지는 아니겠죠. 중요한 건 신비한 힘을 찾는 이유는 곧 우연이 거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연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불안과 궁금함을 견뎌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건 모르는 채로 덤덤히 지나가는 태도를 가질 때 우연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복하지만 우연은 왜 그 일이 벌어졌는지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연인 것입니다.


당신은 우연히 이 편지를 읽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알게 될 원인이 있어서, 또는 신비한 힘이 작용해서가 아니라, 그냥 어쩌다 이 일이 벌어져 버린 것입니다. 우연을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경제학자 다케우치 케이는 우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은 비로소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됩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우연이라 인식하려면 가능했던(하지만 일어나지 않았던) 또는 앞으로 가능한(하지만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다른 경우를 헤아리는 상상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때로 이 상상은 고통스럽습니다. 소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테레사는 토마시에게 말합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Z를 사랑했을 거야.” 이 말은 들은 토마시는 테레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실현되지 않았으나 실현될 수 있었던 우주를 상상합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믿은 그들의 사랑이 실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던 우연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필연의 사랑이 우연의 사랑으로 바뀌자, 토마시는 사랑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힘들어 합니다.


필연은 그것의 원인이 되는 무겁고 거대한 사건으로부터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발생해서 모든 걸 평범한 일로 만들어버리는 우연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곧바로 답하는 대신 생각할 시간을 드리고 싶습니다. 잠시 길을 에둘러 가보도록 하지요. 앞서 말한 것처럼, 사건이 발생할지 여부가 불확실할 때 우연이란 개념이 성립합니다. 하지만 사건마다 발생할 가능성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길을 걷다 새똥에 맞을 가능성은, 걸어가던 새가 당신 똥에 맞을 가능성보다는 분명 더  것입니다. 19세기 무럽, 인간은 우연의 크기를 계산하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게 확률론입니다. 이제부터 확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단, 확률에 대한 여러 입장 중 '빈도주의'란 관점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빈도주의자들은 우연을 믿습니다. 그리고 자를 이용해 물건의 길이를 재듯이, 우연의 불확실성 역시 적절한 도구를 이용한다면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쓰는 도구는 바로 '영원한 반복'입니다. 어떤 사건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연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그 답이 바로 확률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 확률이 50%라는 말을 빈도주의자들은 "동전을 계속해서 던지면 앞면이 100번 중 50번 정도로 나온다."라고 해석합니다. 한없이 반복될 수 있거나, 적어도 한없이 반복된다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에는 이런 식으로 확률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빈도주의 확률 개념은 보기보다 까다롭습니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서 추반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권 한 장을 꺼내며) 내가 이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얼마인지 알아? 50%야. 당첨되거나, 안 되거나. 단순하게 생각하라고. 확률은 항상 반반이니까."


이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습니다. 모든 복권은, 당첨 가능성이 크든 작든, 당첨되거나 당첨되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절반 정도만 당첨된다거나 하는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이 점은 정말이지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추반장의 말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확률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죠. 확률은 한 장의 복권이 당첨인지 아닌지 그 가능성을  말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확률은 단 한 번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라도) '영원히 반복'되는 사건에 관한 개념입니다. 한없이 많은 복권의 당첨 여부를 확인해본다면 이 복권들은 당첨된 것, 당첨되지 않은 것, 둘 중 하나에 속할 것입니다. 그 비율이 반반일 때에만 복권 당첨 확률을 50%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빈도주의자는 밀란 쿤데라의 이 말을 '확률'이란 말을 사용할 때마다 되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마주하는 사건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실제 삶에 확률을 이용하려면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의사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일 강수 확률이 10%라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이 일기예보는, 내일 같은 기상 조건을 가진 날이 무수히 반복된다면 100번 중 10번 꼴로 비가 오지 않을까하는 예상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보면 내일 강수 확률 10%라는 예보는 사실 '내일'에 대한 예보가 아니라 '내일 같은 나날들'에 대한 예보인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당장 내일 경험하는 건 '내일 같은 나날들'이 아닌 '내일' 그자체입니다. 내일은 단 하루뿐입니다.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그 단 하루에, 비는 오거나 오지 않을테고, 우리는 우산을 챙길지 말지 선택해야 합니다. 확률은 숫자일 뿐이고 이 숫자를 참고해 결정을 하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확률에서 측정하는 '불확실성'의 의미 또한 이해하기 쉬운 게 아닙니다. 이것도 예를 통해 설명해 보지요. A가 동전을 던졌고, B는 그 결과를 모르는 채로 '앞면'이 나왔다 예상한다고 해봅시다. B의 예상이 맞을 확률은 얼마일까요? 이 확률은 놀랍게도 50%가 아닙니다. A는 이미 동전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가 앞면인지 뒷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뭐든 간에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은 조금도 불확실할 게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B가 그 결과를 앞면으로 예상하는 일을 무수히 반복한다고 해봅시다. 앞면, 앞면, 앞면, ... 이 예상은 언제나 맞거나 아니면 언제나 틀릴 것입니다. 즉 B의 예상이 맞을 확률은 50%가 아니라, 100% 또는 0%입니다. 이처럼 확률이 측정하는 불확실한 사건은 '모르는 일'이 아니라 주로 '결정되지 않은 일'을 말합니다. 과거의 일은 확실하기에, 확률을 굳이 말한다면 0% 아니면 100%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일은 불확실하기에, 그 불확실성의 크기를 0%과 100% 사이의 값으로 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확률이 필요한 걸까요? 그냥 직감에 따라서 결정하면 안되는 걸까요? 결정은 인간의 몫이라면서요? 뭐 맞는 말입니다만, 확률 없이 직관에 의지하면 우연의 크기를 잘못 판단할 위험이 있다는 건 경고하고 싶습니다. 여기 이언 매큐언의 소설 <스위트 투스>에서 샐리가 톰에게 낸 문제가 있습니다.

“(…) 그 프로그램 사회자는 몬티 홀이라는 남자였지. 당신이 몬티 프로그램에 참가자로 나갔다고 가정해보자고. 당신 앞에 밀폐된 상자 세 개, 1번, 2번, 3번이 있고 그 상자 중 하나에 굉장한 상금이 들어 있어. 이를테면…”
“고액의 연금을 주는 미녀.”
“바로 그거야. 몬티는 어떤 상자에 연금이 들어 있는지 알지만 당신은 몰라. 아무튼 선택해야 해. 당신이 1번 상자를 골랐고 아직 열어보진 않았어. 그 다음에 연금이 어느 상자에 있는지 아는 몬티가 빈 상자 하나를 열어. 그게 3번 상자라고 치자고. 그래서 당신은 고액의 평생연금이 당신이 고른 1번 상자 아니면 2번 상자에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돼. 이제 몬티가 당신한테 2번 상자로 바꿀지 아니면 1번 상자를 고수할지 선택할 기회를 줘. 연금이 어디에 있을 가능성이 더 클까? 상자를 바꿔야 할까, 그대로 있어야 할까?”


수학적으로는, 선택을 바꿨을 때 연금을 받을 확률은 2/3로, 선택을 고수했을 때의 확률 1/3보다 두 배 더 높습니다. 샐리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반면 톰은 이 반직관적인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합니다. “음, 아냐,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내 말은 난… 실은 나 토할 거 같아.” 그렇지만, 토가 나오더라도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요? 확률은 그런 정확한 시선을 갖게 합니다.


확률은 명쾌합니다. 그래도 현실을 확률로 해석할 때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특히 '기적'을 이해할 때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한 미국인이 4개월 동안 복권에 두 번 당첨되거나 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별로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 통계학자인 디아코니스와 모스텔러는 이런 기적에 왜 놀랄 필요가 없는지를 ‘풀 한 포기의 역설’로 설명합니다. 제가 넓은 들판에서 풀 한 포기를 뜯어낸다고 해볼게요. 이 들판은 너무 넓어서 특정한 풀 한 포기가 선택될 확률은 1만 분의 1도 안 된다고 해보죠. 그렇더라도 풀 한 포기가 적어도 하나 뜯길 확률은 100퍼센트입니다. 한 미국인이 4개월 간 두 장의 복권에 연속으로 당첨될 확률이 17조 분의 1이라 하더라도, 같은 기간 미국 어디선가 복권에 두 번 당첨된 사람이 있을 확률은 30 분의 1 가량으로 훨씬 높습니다. 즉 어떤 우연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할 수 있어도, 어디선가 희박한 우연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가끔씩 일어나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우연과 확률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거진 다 했습니다. 그럼 다시 편지 얘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당신이 이 행운의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우연히 이 편지를 읽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게 뭔지는 모르더라도 모종의 원인에 의해 필연히 편지를 읽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어느 쪽의 해석을 택하든 잘못된 건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우연히 편지를 읽었다고 본다면, 그 의미를 더 파고들어가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우연은 얼마나 대단한 걸까요? 바닷가에서 행운의 편지를 발견하는 건 아주 드문 기적같은 일입니다. 하필 당신에게 이 기적이 일어났다는 건 몹시 신기한 일입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는 별로 신기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행운의 편지에 어느 정도로 신기해해야 하는 건가요? 이 또한 당신의 자유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보죠. 이 기적을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이 이미 행운의 편지를 받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즉 행운의 편지를 받은 기적은 이미 벌어져버린 과거의 사건입니다. 빈도주의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이 기적이 얼마나 힘든 우연이었는지 따지는 건 별로 영양가가 없습니다. 과거의 사건은 확실한 일이며, 확률은 불확실한 일을 따지는 데 쓰는 거니까요.


앞서 길게 확률 이야기를 한 건 당신이 불확실한 미래를 다르게 보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미래의 어느 하루를 떠올리며 그 단 하루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하루에는 행운이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반반입니다. 하지만 같은 하루를 보면서도, 그 하루가 영원히 반복되는 상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빈도주의자의 관점입니다. 그 무수히 반복되는 하루 하루는 행운과 불행, 그리고 대부분은 행운도 불행도 아닌 어정쩡한 날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의식하며 단 하루를 맞이하는 것과, 그 단 하루만을 생각하며 하루를 맞이하는 건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그 하루에 대비한 어떤 의사결정이 필요하다면요. 어떤 관점을 가질지는 당신에게 맞기겠습니다.


그럼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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