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계곡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우리 가족은 피서로 화양계곡이라는 곳에 갔었다. 8월이라 한창 더웠지만 시원한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수박을 한입 베어 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동생과 물총을 쏘며 노는 것도 재미있었고 수영과 튜브놀이도 좋았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가족에게 위험한 일이 벌어졌다.
첫 번째, 나는 넓은 바위 위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잠시 눈을 뜨고 옆을 바라보니 동생이 강물이 흐르는 모래 위에서 나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당시 초등학교 4학년). 그리고 바로 밑에는 큰 낙차로 계곡 물이 떨어지고 있었으며 큰 바위들이 있었다. 실제로 30초만 더 늦었으면 동생이 서 있던 모래가 물살에 푹 꺼졌을 것이고 동생은 그대로 휩쓸려 떠내려갔을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뛰어가 동생의 손을 있는 힘껏 잡고 끌어올렸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초인적인 힘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급박한 순간이었다.
두 번째, 동생을 구한 지 채 1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버지에게도 일이 생겼다.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으시다 미끄러져 거센 계곡물 속에 빠지고 말았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우리는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리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나는 정말 그때 아버지가 익사하시는 줄 알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필사의 힘을 다해 수영을 하였고 수초를 잡고 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수초를 잡는 순간 아버지의 몸이 홱 하고 돌아갔으니 얼마나 물살이 거샜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의 즐거웠던 시간은 갑자기 지옥이 될 뻔했지만 다행히 우리는 필사의 힘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그때 동생을 보지 못했다면? 아버지가 필사의 힘으로 수영을 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동생과 아버지는 지금 가족과 함께 있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종종 그때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도 비슷한 것 같다.
평범했던 일상이 갑자기 위기의 순간으로 바뀔 수도 있고, 하던 일이 실패하여 낙담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자책과 자괴감에 휩싸여 마냥 주져 앉아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인생의 파도 앞에서 때로는 주져 앉고 때로는 어찌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을 겪을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이들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나도 두려움과 억울함, 화와 슬픔 속에서 단 한치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내가 잘 보는 TV 프로그램 중 하나는 <무엇이든 물어보살>이다. 이수근과 서장훈이 다양한 고민을 가진 사람을 만나며 그것을 해결해 주는 프로그램인데, 게스트들의 고민은 정말 다양한 것 같다. 애교스럽고 장난스러운 고민도 있지만, 무겁고 가슴 시린 고민도 있다. 또 답답하고 짜증 나는 고민도 있다. 나는 이런 다양한 고민들 앞에서 이수근과 서장훈은 어떤 태도를 갖고 어떤 조언을 해 주는가를 유심히 본다. 내가 보기에 그들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조언은 "위로"와 "감싸줌"이 아닌, 아프지만 팩트 폭격이다. 다시 말해 "정신을 차리게 해 주는" 말들이다. 물론 고민에 맞게 적절히 냉, 온탕을 넘나들며 밸런스를 유지하지만 그들이 하는 최선의 조언은
현실의 문제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망가지 말고 일어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위기를 헤쳐나가란 말이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고민을 이야기하고 사회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민을 풀어주는 토크쇼였다. 그 프로에서 내가 좀 의아했던 장면이 하나 있었다.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고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에게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냐"라고 반문했던 장면이다. 그리고 그 말을 했던 연예인이 생각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은 곧바로 사라져 버리는 연기 같았고 그래서 더 공허했다. 위로와 힐링이 필요한 시대라고도 하지만 결국 나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하면 힐링이고 뭐고고통은 계속될 것이니 말이다. 사회 탓을 하고 어른 탓을 하고 정치를 탓 하지만, 그것은 대중의 분노를 일으키고 어느 한쪽 방향으로 독이 뭍은 화살촉을 겨냥하는 것일 뿐, 내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살다 보면 감싸줌과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현실이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연예인이 학생들에게 진심이었다면 현실도 함께 이야기했어야 했다.
요즘은 위로와 힐링의 시대를 넘어 "포기의 시대"로 가는 것 같다.
포기하면 편하다
"어차피 될 놈은 정해져 있다". "힘들면 하지 마라, 직장이 맘에 들지 않으면 나와라, 뭐 어때 되는 사람만 되고 안될 사람은 안될 텐데 오늘이라도 편하게 살자. 조금씩 메시지는 다르지만 결국은 나를 놓아버리라는 이야기다. 즉, 편안한 포기의 시대를 종용한다.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얼마나 힘들고 불안하면 이럴까라고 이해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 어느 곳에서 "너는 이렇게 생각해야 해!"라고 우리를 몰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은 힘들지만 살만한 곳이기도 하다. 악도 있지만 선도 있다. 돌(?) 아이도 있지만 예의 바른 사람도 있다. 취약층에 대한 사회적 책임도 필요하지만 개인의 노력과 선택, 이로 인한 성취도 존중되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어야 하지만 책임과 의무도 필요하다. 세상엔 진보적 관점도 필요하지만 보수적 관점도 필요하다. 똑같은 상황에서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해 내는 사람도 있다. 문이 닫히기도 하지만 열리기도 한다. 이처럼 세상은 하나의 개념과 이데올로기로 정의하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무엇인가, 누군가 계속 세상을 프레임 하고 심플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생각을 따라간다.
비근한 예로 한 때 유행했던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오직 한번뿐)가 있다. 아쉬운 것은 욜로의 본질적 바탕보다 "인생 뭐 있어?"와 같은 단순 자기 포기적 시각으로 잘못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디어, 언론, 기업 마케팅, 컨설팅산업 등에서 엄청난 홍보 아닌 홍보를 했다. 이는 유행성 소비형태로 전환되어 누군가, 어느 집단에게 많은 이득을 보게 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아무튼 지금 욜로는 잠잠하다. 또 다른 유행어나 개념이 그 자리를 채울 뿐이고 사람들은 다시 그것을 따라갈 뿐이다.
나는 미디어나 언론, 지식인들, 컨설턴트들이 만들어 내는 어떤 개념이나 유행어를 시대의 조류로(트렌드) 그냥 받아들이는 것보다 "내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내놓는 새로운 개념을 따라가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보다, 내 생각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시대의 트렌드를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쓰라린 현실 앞에 타인의 위로와 감싸줌은 우리를 따듯하게 한다. 그리고 힘을 내서 길을 나설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고된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게 하는 힘은 나 스스로 두려움을 직면하는 방법뿐이다.
두려움을 바라보게 하고, 도망치지 않게 하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 말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팩트를 들춰내야 하기 때문이다. 팩트는 나에게 상처이자 두려움이며 넘지 못하는 벽이다. 하지만 상처를 치유하려면 환부를 봐야 하고 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앞서 나는 두려움과 억울함, 화와 슬픔 속에서 단 한치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라고 자문하였다. 나의 답은 이렇다.
그것은 두려움에서 도망치지 않게 하고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하고 그래서 다시 일어날 수 있게, 정신 차릴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모습이다.
태준열 (taejy@achvmanaging.com)
리더십 코치/컨설턴트
25년 동안 음반회사, IT대기업, 반도체 중견기업, 소비재 기업 등 다양한 기업에서 인사, 조직개발 업무를 경험하였으며 15년 동안 인사팀장/조직개발실장을 맡아왔다. 현재는 리더십 개발기관 Achieve. Lab의 대표이며 팀장 리더십, 성과관리 등 강의와 팀장 코칭, 리더십 개발 컨설팅, 조직개발 활동 등을 활발히 이어 나가고 있다. 저서로는 <어느 날 대표님이 팀장 한번 맡아보라고 말했다><Synergy Trigger><존버 정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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