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가르친다는 일에 대해, 내가 세운 하나의 기준
나는 가끔 아이들과 기싸움을 한다. 정확히 말하면, 기싸움처럼 보이는 선택을 한다. 정규반에 바로 넣기 어려운 아이들을 주로 맡는다. 기본이 무너져 있어 진도가 맞지 않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을 정규반으로 보내기까지의 시간을 담당하는 역할이다.
그 과정에서 자주 마주하는 장면들이 있다. 과제를 베껴 오는 아이, 문제를 풀지 못하는 이유를 “선생님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아이, 고1이지만 중등 과정을 거의 모르면서도 “모르는 걸 어떡하냐”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 그럴 때마다 마음이 흔들린다. 더 설명해 줘야 하나,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 설명은 친절해 보이지만, 모든 친절이 성장을 돕지는 않는다는 것. 최근 예비 고1 학생 한 명이 있었다. 기본이 많이 부족했고, 그래서 나는 설명을 줄이기로 했다. 대신 아이 스스로 문제를 풀게 했다. 답을 주기보다 기다렸고,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이는 힘들어했다. “몰라서 못 푸는 걸 어떡하냐”고 말했고, 한 문제를 맞히면 초등학생처럼 웃으며 “저 천재인가 봐요”라고 말했다가 다시 틀리면 교재에 낙서를 하며 “어떡해요, 어떡해요”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여러 번 흔들렸다. 달래면서 가면 아이의 표정은 분명 더 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식으로 아이가 앞으로 시험을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기준을 세웠다. 설명 대신 기다리기로, 답 대신 질문을 던지기로,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머무르기로 했다. 솔직히 퇴원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불친절하다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남았다. 그리고 어느 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왔다. 내가 계속 설명해 주며 끌고 갔을 때는 두 달 동안 소단원 하나였다. 네가 힘들어도 스스로 해결하면서 온 지금은 2주에 소단원 하나다. 지금은 괴롭겠지만, 이렇게 해야 시험을 볼 수 있다.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건, 아이가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줬기 때문일 것이다. 정답은 없다. 다만 점점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모든 친절이 아이를 살리는 것은 아니고, 기준을 세운다는 일은 아이보다 어른을 더 괴롭게 한다는 것. 그 괴로움을 견디는 일이, 어쩌면 가르친다는 일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