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일출봉
다음날 아침 느긋하게 일어났다. 비행기 소음에 옆방 소음으로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는데 한라산 소주의 도움으로 푹 잤다.
초이네가 브런치로 선택한 식당은 아내가 심사숙고하여 찾아냈다. 인당 8천 원 백반정식 단일 메뉴인 한식당이다. 성산일출봉 정상 탐방을 딸과 하기로 했는데 식당 위치가 가는 길에 있어 다행이었다. 열한 시 삼십 분 식당 앞에 도착하니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차량 한 대가 빠져나온다. 옳거니 자리 났다.
기본 반찬들이 눈에 익숙했다. 콩나물, 무생채, 미역국, 된장찌개, 두부 전, 삼겹살 수육, 꼬막, 고등어조림 등을 이모님아 투박하게 상위에 놓는다. 겉은 쌀쌀맞게 생겼어도 속은 정 많게 대하는 그런 사람처럼 말이다. 반찬들의 맛은 친절했다. 가성비 좋은 백반 차림새다.
"해장국 만 원에 비하면 이 집이 싼 거네"
"그만!"아내가 볼멘소리로 한마디 던진다.
제주뿐 아니라 여행을 다녀보면 삼시 세끼를 꼭 챙겨 먹게 된다. 집에서 지낼 때는 아침을 거의 먹지 않는데 여행에선 꼬박꼬박 챙기는 이유는 뭘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여행지의 풍경을 심미적으로 보지 않게 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배를 든든히 해줘야 두뇌로 가는 영양분이 충분해지고 뇌가 활발해지기 때문인가. 그래야만 온몸으로 뻗어 내린 신경줄기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을 명료하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인가. 뭘까? 정답이. 아니면 말고.
아무튼 브런치로 든든해졌다. 성산일출봉 정상을 거뜬히 오를 수 있겠다. 열두 시 오십 분 성산 일출봉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관광객들이 만원이다. 아내는 산행을 할 수 없는 약한 몸이라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딸과 함께 정상으로 향했다. 제주에 올 때마다 성산 일출봉을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다른 동행자들이 따라주지 않아 다음을 기약했는데 오늘 그 소원을 푸는구나.
주차장에서 성산 일출봉을 바라보면 꽤나 높다고 생각되는데 왕복 50분이 소요된다는 매표소 안내 문구에 보기완 다르구나 했다. 딸과 함께 성산 일출봉을 올라보는 날이 오는구나. 정상까지 계단식이고 가파른 구간이 없다. 천천히 올라가다 잠깐식 쉬고 다시 올랐다. 오르면서 아래를 굽어보니 제주의 절반을 조망하는 느낌이다.
정상은 오목한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정상에서 바라본 제주의 바다는 드넓다. 하늘과 닿은 바다에 선을 그어 바다와 하늘을 구분한듯하다. 정상에서 한라산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다. 시계가 선명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일출봉은 등산길과 하산길이 따로 있어 사람들끼리 부딪히는 일은 없다. 등산길 계단은 가파른 느낌이 없었는데 하산길 계단은 경사가 급한 곳도 있었다. 계단을 내려갈 땐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앞 굼치만 디디면서 잰걸음으로 내려와야 한다. 터벅터벅 내려오면 무릎이 뻐근해질 수 있다. 올라갈 땐 뒤꿈치로 계단을 도움닫기처럼 디디고 사선으로 밟으면 힘이 덜 든다.
"많이 힘들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딸을 향해 감회를 물었다.
"별로, 올라갈 때만 쪼금 히히"
오후 한 시 오십 분 일출봉을 내려와 제주도를 일주하는 의미로 서귀포 쪽을 택했다. 딸이 서귀포 쪽에 있는 카페가 바다 뷰도 좋고 커피도 맛있다고 소개한다.
"오호 그래 카페인 섭취할 타임이긴 해." 내비 양의 안내 예정 시간보다 빨리 도착하려고 액셀에 힘을 주었다. 오후 세시 카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와보니 이국적인 풍경에 이런 곳이구나, 좋은데.
카페 야외 자리에서 바다를 내려보면 온몸 혈관이 막힌 곳 없이 뚫리는 기분이다. 커피도 내가 좋아하는 향과 맛을 지녔다.
아내는 저녁으로 해물탕을 먹자고 한다. 식당 주차장 입구가 숙련된 운전자여야 차량에 스크래치 없이 주차할 수 있을 만큼 좁았다. 나는야 숙련자다. 새 차라 더 조심히.
네 시 오십 분 기다림 없이 자리에 앉아 해물탕(중)을 주문했다. 전복이 많다고 할 정도로 올려졌다. 낙지는 냉동인 것 같다. 새우는 싱싱하게 보였지만 조개는 국물 용인가 보다. 얼큰한 국물은 끝내준다. 이 국물에 칼국수나 라면사리를 끓여먹지 않으면 손해다. 라면사리 추가요.
얼큰한 저녁을 먹고 서귀포 올레시장으로 갔다. 딱새우 회 2만 원, 레드향, 오메기떡, 한라봉차, 우도 막걸리를 구매했다. 시장의 활기가 일반 가게까지 퍼져나간다면 좋으련만.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아쉬운 마음으로 보내야 한다. 숙소로 가는 동안 서쪽 하늘에 주홍빛으로 노을이 펼쳐졌다. 도로에서 보는 노을도 황홀하게 하는구나.
저녁 십구 시 이십 분 숙소에 도착해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딱새우 회는 싱싱한 새우의 맛이 느껴졌다. 우도 막걸리는 살균이라 술맛이 나지 않는다. 한라산 소주를 마셨어야 했는데. 맛보기 오메기 떡은 달지 않고 재료 고유의 맛이라 맛있게 먹었다.
제주에서의 막 밤은 짧은 일정의 아쉬움과 또 다른 희망을 품게 했다. 이틀 동안 차량으로 제주의 해안 도로를 일주했다. 주마간산으로 훑어보고 지나쳤지만 제주의 바다 빛깔은 매 순간 유혹의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제주의 바람은 온몸을 휘돌아 들고나감을 멈추지 않았다. 제주의 멈추지 않는 손짓 발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라산 소주가 맛있어요.
초이는 여행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여행이란 단어는 누구라도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행동주의자로 만든다. 날짜를 정하고 여행지를 선정하고, 첫날엔 어디를 관광할 것인지 어떤 음식을 맛볼 것인지 계획성 있게 여행플래너를 짜게 한다.
제주의 어디를 갈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검색하고 네이버 플레이스를 공유해 가족의 동의를 구한다. 대개 남들이 찾아간 곳을 우리도 가보고 남들이 맛있다고 칭찬한 맛집을 탐방하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다는 장소가 실제로 좋을 확률이 높다. 많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외치면 맛있을 확률이 높지만 아닐 수도 있음을 이번 여행에서 깨달았다.
제주도는 사계절 어느 때 가더라도 맑은 공기에 폐가 정화되고 바람 소리에 귀가 호강하며 검푸른 드넓은 바다에 눈이 빛난다. 해외여행에 나가지 못하는 여행객들을 제주도로 끌어당기는 요인들은 많다. 양적으로 팽창한 정보 속에서 양질의 장소와 맛집을 찾아내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어야 한다.
우리 가족의 여행 콘셉트를 살펴보면 여행지 주변의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고 실제 맛있으면 성공이요 맛없으면 여행 실패로 여긴다. 여행의 실패와 성공의 기준은 맛있는 음식을 몇 끼니 먹었느냐에 있다. 여행 기간 동안 총 여섯 끼를 먹어야 한다면 네 번은 먹었어야 만족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주도를 여러 번 탐방했지만 대개가 2박 3일이나 3박 4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도 가도 가보지 못한 곳이 생긴다. 예를 들면 마라도는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볼거리가 없다지만 최남단 섬이라면 한 번쯤 가볼 수 있는 장소인데도 못 가 본 것이다.
이번 제주여행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맛없는 음식도 먹었으니 맛집 방문은 평작이다. 그렇지만 딸과 함께 성산일출봉 정상을 밟았다는 것이 가장 즐거운 추억이었다 할 수 있다. 하나의 추억거리를 남긴 셈이다. 언젠가 한라산을 동행할 날도 올 것이라고 상상한다.
다음의 여행은 아무런 검색 없이 맛집을 찾아내고 싶다. 낡은 식당의 여주인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 나이가 오십오 고개를 넘었으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주인이라면 그 가게는 오랜 시간 동안 손님을 맞이했었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마을의 노포 식당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을까.
여행을 다녀오면 후유증이 찾아온다. 며칠은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더디다. 왜냐하면 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역마살이 내 몸 세포 어디인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