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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초이 Aug 09. 2022

장례식장 방문을 통해

어머니들의 죽음

'엄마 오늘 돌아가셨어' 친구의 문자가 도착했다. 그렇게 됐구나. 상심이 크겠다. 고생하시게라고 답장했다.


이제 어머니들을 보내는 나이가 되었구나. 부모님들은 생존해 계시지만 주간 돌봄 센터를 다니신다. 스스로 일상을 지낼  있지만 누군가의 작은 돌봄으로 자립의 시간을 늘리기 위한 기관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아동으로 회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해진다.


옛날에는 어린 자식의 손을 잡아주는 부모가 있었다. 늙은 부모님의 손을 잡아   있는 자식들이 있었다. 요즘은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잡아주고 노인 주간 돌봄 센터 보호사님이 잡아주고 있다. 자식 가진 부모들은  벌기 바쁘니까. 노령 부모 계신 자식들 벌기 바쁘니까. 돈을 벌어서 자식  잡아주는 분에게 드리고 부모  잡아주는 분에게 드려야 하니까.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아무리 외쳐도 결국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니 돈으로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정치인들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인이 정책을 펼치려고 해도 재원 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로 지적받는다.


카톡으로 직장동료, 지인의 부고 문자를 받는다. 부고 하단에 마음 전하실 곳으로 은행 계좌가 보인다. 코로나 시기가 아직은 종료되지 않아 친분관계에 따라 조의금만 보내게 된다. 마음이 전해질지 모르지만 송금으로 보낸 사람의 마음은 애써 편하게 먹게 된다. 그렇지만  참석해야  대상은 있다.  참석하고 나면 터널을 빠져나와 맞이하는 햇빛을  것처럼 마음은 환해진다.


지난 일요일 문상을 다녀올 때의 일이다. 카톡에 올라온 장례식장 알림판에 적힌 고인의 연세를 본다.  연세를 기준으로 부모님 연세를 빼본다. 10 이상 차이가 나는  보면서 생각해낸다. 친구의 어머님이 요양원 생활을   하셨다고 했었는데. 수년간 요양원에 계시면서 찾아뵈어도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다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장례식장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의 고민을 했다.  피곤함만 먼저 생각하게 된다. 코로나 핑계로 부고 알림장에 쓰인 마음 전하실 곳으로 전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화로 못 간다고 얘기하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친구에게 전화하니 "내려오는 중이니? 어 잠깐 내가 다시 전화 줄게." 그러고 끊는다. 순간 갑자기 미안해지고 옹졸한 생각을 해낸 내가 미웠다. 당연히 찾아올 줄 아는 친군데 그런 줄도 모르고 핑계를 찾아내다니 사람이 아니구나 난.


부의금의 돈이 중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돈이란 그저 수단에 불과한데.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얼굴을 마주 보고 엄마 보낸 외로움을 나눠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 친구에게 마음을 전하는 것임을 몰랐던 것이다.


나는 당장 일어나 찬물로 몸을 깨웠다. 가야지 가서 친구의 얼굴을 봐야지 그게 친구인 것이지 나를 다독였다.


사실은 토요일 오전에도 충주에 있는 탄금 장례식장을 다녀오고 야간 출근을 했는데 그날 밤에 친구에게서 문자를 받게  것이다. 일요일 오전은 잠을 자고 오후에 일어나니 카톡에서 전날 다녀온 탄금 장례식장인 것을 알게  것이다. 토요일은 동생 시어머니 장례로 반드시 가봐야 하는 조문이었다. 일요일 다시 다섯 시간을 왕복하려니 꾀가 났다. 그런 어쩌면 작은 이유로 핑계를 찾으려고 던 것이다.


아내에게 초등학교 친구 중에서 연락하고 만나는 여사친의 모친상임을 고하고 내려갔다. 일요일 오후의 고속도로는 비교적 원활하게 움직였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반가워하는 친구의 얼굴을 안도했다. "내려오는데 힘들었지. 고마워." "아니 별로 막히지 않았어."


친구는 다른 친구들이 찾아와 주었다고 얘기한다.  다시 한번 내려오길 잘했구나 생각한다. 장례식장에서 보내는 짧은 시간이지만 찾아주는 친구들의 성의는 오래 남을 것이다. 내가 아직 부모상을 치르지 않아 감사함을 모를  있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이것저것 생각한다. 부고 알림장에 마음 전하실 곳은 은행계좌가 아니구나.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손을 맞잡고 체온을 전달해야 한다. 이제 부모 없는 외로운 존재가  친구의 마음을 나누려면 말이다. 그렇게 마주 보고 인사해야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번의 왕복 시간 동안 피곤할 수도 있는 몸은 뿌듯해진 마음 때문인지 가볍게 느껴진다. 마치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것처럼 마음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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