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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초이 Sep 01. 2022

가을비 내리던 날에

가을비는 추억을 부른다

가을비가 하루 종일 내리던 날 때 일이다. 산천초목을 뜨겁게 달구던 대기를 식혀준다. 바람 없이 가냘픈 소리만 내며 대지로 떨어진다. 빗방울은 아스팔트에 쉴 새 없이 원을 만든다. 작은 원을 지우고 그보다 큰 원을 만든다. 비가 내리는 날은 맑은 날과 다르게 추억을 소환한다.


오전에 볼일이 있어 노원역 근처를 다녀왔다. 집에서 갈 때는 버스를 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땐 걸었다. 우산을 쓰고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걸었다. 내 앞에서 걸어가는 남녀가 보인다. 여자는 우산을 접어들고 남자의 우산을 쓰고 있다.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아내와 데이트를 하던 시절이다. 친구는 내게 조언을 건넸다. "여자랑 비 올 때 데이트는 우산을 하나만 써야 한다. 따로따로 우산을 쓰면 안 되는 거다. 알겠지"


그래서 그랬을까 아내는 우산을 접은 채 들고 난 우산을 펴 아내 쪽으로 기울여 걸었다. 한 팔은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쪽으로 당긴다. 그러다 보니 내 반대편 어깨는 비를 흥건하게 맞는다. 가을비 우산 속의 스킨십은 친밀감을 높인다.


여름 비는 청춘의 몸짓이다. 질풍노도의 청춘들을 말릴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길들이려고 하면 더 날뛰는 야생마다. 여름 비의 체구는 헤비급이고 강한 바람을 호위무사로 대동한다. 화가 나면 도로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대놓고 야단치기보다 그저 잠잠해지길 기다릴 뿐이다.


가을비는 인생의 험한 꼴을 경험한 중년이다. 호기로운 시절을 보냈다. 성질대로 골 내봐야 자기만 손해 입고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바람이 없는 날이 많지만 태풍을 몰고 오는 날도 있다. 대지를 밟고 다니는 인간들에게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술법을 부리기도 한다.


반팔 셔츠만 걸치고 야외활동을 하던 몸은 가을비를 맞자 가을 점퍼를 꺼내고 만다. 계절의 변화는 몸이 먼저 알아챈다. 몸이 인지하면 마음은 뒤따라 반응한다. 나이도 가을에 접어들었다. 나이보다 마음은 뒤처지려 한다.


가을비 내리는 거리를 걷다가 와서 그런지 몸이 서늘해진다. 오후 들어 아내에게 "우리 부추전 만들어 먹을까요?" 아내는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물음에 마땅한 대답 없이 "왜요?" 하더니 "비가 와서 그래요?" 되묻기만 하다가 "그래요. 그럼 재료를 사 오세요. 오징어도 있으면 사 오시고요."


"부추를 사 올 테니 반죽해요. 전 부치는 건 내가 할게요." 대답과 동시에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동네 마트에서는 냉장 오징어 세 마리를 9900원에 팔고 있다. 이틀 전에도 값싼 오징어를 구입해 오삼불고기를 먹었던 것이다.


마트에 가보니 오징어를 판매하고 있었다. 부추와 사과, 아내가 좋아하는 바나나까지 사들고 왔다. 아내에게 오징어 손질과 반죽을 부탁했다. 오징어 손질을 해보지 않아 아내에게 맡긴 것이다.


잠시 후 "다 됐어요." 하는 아내의 부름을 듣고 거실에서 요리하고자 브루스타를 준비했다. 프라이팬에 열을 가해 달군다. 호떡 크기보다 작은 원이 되도록 식용유를 떨구어 팬 전체를 두른다. 부추와 오징어가 넉넉히 담긴 부침 반죽을 국자로 떠 팬 중앙에 놓는다. 국자로 가운데부터 원을 그리며 반죽을 곱게 펴 모양을 만든다. 가장자리에서 기름이 지글지글 지르르르 소리를 내며 익어간다. 뒤집개를 이용해 뒤집을 때다. 부추전이 맛있는 소리를 내며 뒤집기에 성공한다.


뒤집은 부추전을 뒤집개로 눌러줘야 한다. 눌러주면 골고루 익고 기름이 스며들며 생기는 구멍을 메워준다. 뒤집개를 눌러주며 익히고 다시 뒤집어 눌러주는 것이 내가 만들어먹는 부추전의 포인트다.

"자긴 전을 잘 부친다. 장사해도 되겠어."아내는 오물오물 전을 씹으며 말한다. 전을 먹는 아내를 보니 우산 하나론 부족하겠구나 생각했다.


비 오는 날에는 기분이 다운된다. 다운된 기분을 올리기 위해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품은 부추 오징어전을 만들어 먹었다. 마음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비 오는 날 수채화 같은 공상에서 빠져나와 부추 오징어전의 현실에 만족한다. 또 다른 비 오는 날에는 무엇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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