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나는 서른일곱 살이고 초등학생인 딸과 함께 살고 있다.
9년 전 스물여덟 살.
이혼을 결심했다.
그 신혼집에서 나올 때 아직 돌이 되지 않았던 아이를 업었고, 한 손에는 직장의 유니폼을 들고 나왔다.
나는 ‘홀가분하다, 이제 살 것 같다’ 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시선과 미래가 걱정되었다.
또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아이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냥 숨만 쉬었다.
그것만으로 내가 버티고 있는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왜 이혼을 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주절주절 거리며 말을 하다가 울었다.
어떤 누군가는 "재혼을 하려고 이혼을 했느냐"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그 사람에게 시원하게 욕을 못 해 준 것이 한이 된다. 지금까지도 그 사람을 미워한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엔 내가 있는 날도 있었을 테고 없는 날도 있었을 테지만, 모두 내 이야기를 하며 수군거린다는 생각에 몸을 움츠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이혼한 지를 모르고 그 사람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저 건네는 인사말이었겠지,
그래서 “ 잘 지냅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만난 날, 그분은 또 “신랑분은 잘 지내시죠?”라고 인사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이 분이 그저 건네는 인사말에 다음에도 잘 지낸다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될지, 아니면 여기서 끝내야 될지를.
그리고 정확하게 이야기해줬다.
“우리 이혼했습니다. 같이 안 삽니다.”
속이 시원했다.
숨길 일은 아니었으나 매일 볼 사람도 아닌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말하고 나니 숨겨왔던 마음속의 짐을 덜어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들이나 처음 겪는 순간들이 생겼고 고민을 했다.
같이 일하는 50대의 언니가 조언을 해 줬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 솔직할 필요 없단다. ”
그 뒤, 나는 그냥 건네는 인사말들에 대해서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아이 아빠는 뭐해요?”
“신랑은 뭐해요?”
이런 의미 없이 건네는 인사말엔
“ 그냥 회사 다닙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되더라.
이렇게 9년의 시간 동안
종종 뜻밖의 일이 생길 때마다
나만의 방법으로 지내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이렇다.
그 당시 누군가 나에게,
해보자
살 수 있어
할 수 있어
힘을 내
이런 방법도 있어
라고 말을 해줬더라면 나는 많이 도움이 됐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싱글맘들에게
‘나만의 방법’으로 지내왔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이와 같이 지낼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종잣돈을 만들었던 이야기도 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만의 방법이다.
더 나은 방법도 있을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했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했다.
어떤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주위에 묻고. 스스로 찾아보고. 배워갔다.
그리고 현재,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
내가 원하던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고 있다.
집을 마련하는데 8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배운 것도 많았고 지금도 배우고 있다.
나의 경험으로 배운 것들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발판이 되어,
나보다 조금 더 일찍 목표에 도달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