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곱 번째 편지

2021년 5월 22일

by 주원

외할아버지는 미군 부대를 잘 다니시다가 갑자기 사진이 찍고 싶다며 모두 그만두고 사진작가가 되었습니다.

소공동에 최초로(할아버지 말로는) 후지필름 현상소를 차리기도 했고 88 올림픽 전담 사진 기사이기도 했고, 국선 심사위원이기도 했으니 개인으로서는 성공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가족들은 살림이 어려워져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매우 미워합니다. 가족들의 속도 모르고 할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카메라를 꺼내 들어서 어렸을 적부터 사진과 카메라는 외가댁의 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에게 사진을 가르치진 않았고 대신 가끔 저를 데리고 경복궁에 가거나 옥상에서 포즈를 잡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몇 번이었고 대체로 할아버지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사진만 찍었습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할아버지에게 왜 이런 사진을 찍었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자신의 기술(다중 노출에 관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제가 궁금했던 건 할아버지가 이 사진을 찍고 싶었던 이유였는데 말이죠. 흠. 어쨌든 저와 할아버지의 예술 세계는 다르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사진이 멋지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단호).


피는 속일 수 없었는지 어렸을 적부터 마음속에 항상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디지털 사진 말고 필름 사진이요. 학생이라 돈이 없어서 카메라를 사진 못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블로그를 들여다보기만 했죠. 이제 저는 사회인이고 필름 카메라도 세 대나 있습니다. 사진을 배운 적은 없기 때문에 그냥 찍습니다. 기술보다는 찍는 사람의 세상을 보는 시선과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더 중요하다고 우기면서 말이죠. 그래서 결과물도 엉망입니다. 하하.


약 2년 간 찍은 필름을 모아 현상을 맡겼습니다. 여섯 롤이었는데 그중 두 롤은 영화용 필름이라 충무로에 맡겨야 한다며 돌아왔습니다. 필름을 산 사람은 내가 아닌데, 어째서 사진을 찍고 현상을 한 사람은 나인 걸까요. 필름과 마음을 줬던 사람은 이미 새 시작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나는 아직도 정리 중인 걸까요? 조금 울적한 마음으로 청계천을 걸어보지만, 이 마음 주워 담아 잘 보관해보기로 합니다. 언젠가 만날 소중한 이에게 줘야 하니까요.


오늘은 영화용 필름을 처리할 직원이 없다고 해서 필름을 맡기고 을지로를 걸었습니다. 약간 길치라 지도 어플을 항상 봐야 하지만 을지로부터 광화문까지는 지도를 보지 않고도 걸을 수 있는 곳입니다. 초록들과 사람들 사이를 부지런히 걸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라이프 사진전도 보고 왔습니다. 라이프 사진전은 매번 열릴 때마다 찾아가기에 지난번에 본 사진이 걸려있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지겹지 않아요. 필립 할스만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한참 전에 특별전도 봤기에 쓱 지나갔고요, 오늘은 전쟁 사진을 열심히 보았습니다. 오늘은 로버트 카파와 유진 스미스의 사진이 마음에 남았어요.


작년에 할아버지는 저에게 당신이 쓰던 카메라 하나를 주셨습니다. 니콘 F3인데, 많이 낡았지만 그래도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나는 이것으로... 아니 카메라로... 잘 안 보이는 걸 찍고 싶습니다. 혼자가 익숙해져 버린 노인과... 더러운 길 고양이와... 빛이 닿지 않는 곳과... 엑스트라처럼 신경 쓰지 않으면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그런 것들이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그런 것들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래서 라이프 사진을 좋아하지요. 사진은 그런 걸 담아야 한다는 저만의 철학이죠. 호호.


올해는 사진을 더 많이 찍고 공부도 해봐야겠어요. 뷰파인더 속의 세상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언젠가, 할아버지의 F3와 아직 주지 않으신 롤라이 플렉스도 제대로 쓸 수 있는 날이 오겠죠.


그럼, 다음에 또 쓸게요.

안녕히.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섯 번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