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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편지

2021년 6월 27일

by 주원

4개월 전에 이사한 이 집은 바람이 잘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해가 져도 집안 공기가 꽤 무거워요.

저는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선풍기를 자주 틀어둡니다. 2년 전에 산 이 선풍기는 틀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매우 조용합니다. 어제저녁에는 소파에 앉아 선풍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미세하게 선풍기 머리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달달-거리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내가 좋아하는 책을 다시 펴보고 싶었습니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는 제일 좋아하는 작가의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표지를 펴면 작가님이 금색 마카로 써주신 사인이 있고 그 위에는 2012년부터 총 다섯 개의 연도와 월이 쓰여있습니다. 네, 읽은 날짜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백의 그림자>를 최소 다섯 번은 읽었습니다. 왜 최소냐면, 읽고 나서 안 적은 적도 있고 읽고 싶은 부분만 읽은 적도 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완독을 해야 적을 수 있습니다.


이달에는 두 번이나 세운 상가에 갔습니다. 부서진 간판과 지붕들 사이사이를 지나는 동안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조금 죄송했는데, 그곳이 삶의 터전인 이들에겐 하릴없이 들어와 이곳저곳에 셔터를 누르고 다니는 게 불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물론 젊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걸 환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요. 나는 그곳에 후미진 골목들을 누비며… 은교와 무재와 오무사 같은 것들을 상상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아쉽게도 없었습니다.


책에서 본 것을 실제로 만나는 건 정말 재밌는 일입니다. 스물한 살 때는 신경숙 작가의 <바이올렛>에 나오는 파스타집 ‘뽐모도로’를 광화문 근처에서 실제로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인공을 만날까봐(그럴 일은 당연히 없지만) 줄을 서는 동안 누굴 찾는 사람처럼 거리를 두리번거렸습니다. 맛은 그저 그랬지만(토마토 파스타를 시켰던 것 같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또 몇 년 뒤엔 김연수 작가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다가 그곳에 등장하는 중국집이 내가 좋아하는 제주의 중국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반가웠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곳의 게짬뽕은 맵지만 참 맛있거든요. 또 제가 좋아하는 이중섭 거리 근처에 있기도 하고요. 그즈음에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누군가를 데리고 그 식당에 방문했지만, 썩 기뻐하지는 않더군요.


아무튼간에 어제저녁에는 단숨에 <백의 그림자>를 다 읽고 그 중간에 오열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왜 울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책이 왜 좋냐고, 이 작가가 왜 좋냐고 물어도 이제는 점점 뭐라 대답하기가 어려워요. 그냥 이건 이제 나의 일부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요?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봅니다. 엄마가 없는 아이들, 아빠가 없는 아이들, 조부모 밑에서 크는 아이들, 그마저도 없어 티브이가 켜지는 소리에 일어나 학교에 오던 내가 좋아하던 남자아이, 가정폭력에 희생된 꼬마들, 그 사이에서 모든 걸 다 가진 채로 자란 나는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내게 당연한 것은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아니고, 그저 우연히 얻어걸린 행운일 뿐이라는 걸 어렸을 적부터 알았거든요. 책을 읽을 때면 그 부채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백의 그림자>를 좋아하는, 우리 모두 조금씩 빚을 지고 있어서 그것을 어떻게든 돌려주고 싶어 하는 누군가들과 함께 팥빙수를 먹거나, 팥죽을 먹거나, 메밀국수를 말아먹거나, 조개찜을 먹는 상상을 합니다. 에이,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올해 언젠가엔 석모도에 한 번 가볼까 해요. 은교와 무재가 걷던 거리를 한 번 걸어봐야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책 읽기를 마치고 2021.6이라고 맨 첫 페이지에 적었습니다. 여섯 번째네요, 어느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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