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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여자

by Minnesota

토요일 오전에 갑자기 홍상수 영화가 보고 싶었다.

시덥잖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무턱대고 유튜브에 홍상수 영화를 검색해서 나오는 목록 중 내가 본 적 없는 영화 <도망친 여자> rent를 했다. 딱 이틀간 볼 수 있는건데 1100원을 지불했다.

토요일 오전에 한번 보고, 오늘 오전에 개와 혼자 산책하는 길 내내 틀어놓고 들었다. 산책 길엔 화면을 보지 않고 배우들이 읊는 대사만 들었다.


어제는 국립극장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봤다. 화장실에서 만난 여자가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에 가득차서 자신감 뿜뿜하길래 너무 웃겼다. 티켓을 뽑는데서 또 만났는데, 자랑스레 뽀뽀까지 하는 그 남자가 애처롭게도 구두까지 신은 그 여자랑 키가 똑같았다. 나는 남자를 볼 때 포기할 수 없는 단 한가지가 '키'인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남자가 돈이 많나보다.'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했으나 남편은 내가 신나서 더 떠들까봐 조용히하라며 핀잔을 줬다.

본래 나도 그렇게 떠들어대는 인간은 아니지만, 너무 오랜만에 영화가 아닌 연극을 보러와서, 황정민을 보러와서 기분이 들떴나보다.


아쉽게도 우리는 1인 45000원 정도의 3층 제일 가격이 싼 자리에서 봤고 황정민의 윤곽만 볼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앉아서 연극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 커튼콜 때 눈물이 울컥 울컥 3번 넘게 그랬다. 울면 쪽팔릴 것 같아서 간신히 참았다.


예전에 라스베가스에서도 태양의 서커스였나, 그 공연을 봤을 때 울컥했었다.

가끔 너무 좋은 것을 보면 그런 울컥이 생겨난다. 참 오랜만에 만나보는 울컥.


연극을 보고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이동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댓비를 맞았다.

간발의 차이로 비를 피했던 것이다. 예약해둔 레스토랑에 가려면 집에 놓고온 할인 쿠폰을 챙겨와야 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식당은 올해 2월인가 3월에 딱 2달 다닌 회사에서 점심 미팅으로 가본 곳이다.

우리는 저녁에 갔고 예약 시 미리 기재해두길 잘했을 정도로 내가 딱 좋아하는 조용하고 구석지고 창가가 보이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거야말로 럭키비키지.


덕분에, 우아한 사진 몇장을 건지게 됐다. 나이들면서 셀카는 정말 드물게 찍고 평일은 평일대로 회사에만 있으니 사진 찍을 일이 없고 주말은 주말대로 화장을 전혀 안 하고 다니니까 찍을 일이 없다.

그러나 다음주 내 생일 기념으로 좋은 식당에 온 기념으로 최대한 사진은 많이 찍었다.

제일 젊은 날이니까.


글라스로 마신 와인 한잔이 너무 맛있었는데 남편은 계속 한 잔이 26000원이라고 3번이나 말하면서 투덜대서 한번 큰소리를 냈다. 구질구질하게 정말.


식당에서 음식은 다 만족스러웠다. 트러플 뇨끼는 우리 눈앞에서 트러플을 갈아 올려 주었고 토마호크 스테이크는 부드러운 지방질과 담백한 근육 부분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뤘다. 남편은 용감하게도 집에 있는 강아지를 위해서 토마호크 뼈를 챙길 수 있냐고 물었고 가져와서 던져주니 한참을 갉아먹고 오늘 아침에도 갉아먹는 중이었다.


평일은 내내 회사 사람들과 있고 주말은 거의 항상 남편이랑 있으니, 일요일 오전에 남편이 농구하러 갔을 때만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허전하고 외로웠는데 이제는 이 시간이 참 좋다.

오늘은 원래 가지 않던 길로 그냥 무작정 걸어갔다. 땀에 티셔츠가 젖어버려 가슴 아래까지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개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남은 힘이 없는지 계속 헥헥댔다.


어제 저녁을 먹고 돌아오기 전에 HANS 라는 곳에 들러 케익을 사왔지만 하루종일 느끼한 것만 먹어서 그런지 케익이 아니라 라면이 땡겼다. 그래서 15만원어치 밥을 먹고와서는 라면으로 후식을 땡기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전철을 밟게 됐다.


매미 허물이 많이 보인다. 매미 우는 소리가 공기에 가득하다.

오늘은 덥지만 바람은 불었다. 바람조차 없는 날도 있으니 여름 바람이 반갑다.


집이 조용하다. 거리도 한산하다.

일요일만 되면 그 많던 사람들은 죄다 어디로 가는걸까.

갑자기 그 많던 사람들중 반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것 같다.


홍상수 영화의 대사를 곱씹게 된다.

계속 듣다보면 내 생각처럼 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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