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018년 2월, 그리고 2020년 2월에 머리를 잘랐다. 처음에는 3년에 한 번 자르는 것으로 계획했었는데 두 번째 자를 때 깜박하고 4년의 텀이 생겨 이번에는 2년 만에 잘라보았다. 최소 길이 25cm에 못 미칠까 봐 과감하게 많이 잘랐더니 30cm 정도가 나왔고 덕분에 머리는 고등학생 시절 이후 가장 짧아졌다. 그래도 머리가 세기 전에, 나이를 더 먹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자르려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니 후회는 없다. 오히려 만족감은 더 높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Locks of Love는 소아암 투병으로 모발이 빠진 어린이들에게 가발을 제공해주는 단체이다. 이 단체를 알게 된 것은 나보다 먼저 모발 기부를 시작한 동생 덕분이다. 7년 전 처음으로 모발을 기증했을 때 카카오 스토리에 담았던 내용을 이곳에 그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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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랐다. 근 20년간 스타일 변화 없이 유지해오던 긴 생머리... 미국에서 살 때 교회를 통해 골수기증을 신청한 적이 있다. 잊고 살다가 작년에 내 골수와 맞는 환자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한국에 있다 보니 연락이 안돼서 어찌어찌 미국에 있는 동생에게 연락이 닿았나 보다. 그때 당시 나는 둘째 임신 중... 임산부는 물론 모유수유 중에도 골수 기증은 불가능하단다. 게다가 환자는 캘리포니아에 있는데 한 번의 기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차례 함께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한다니 현실적으로 기증은 쉽지 않은 상황... 동생이 언니는 지금 임신 중이라고 설명했지만 우선 통화만이라도 하고 싶다며 연락처를 남기더란다. 끝내 그 연락처로 전화해 보지는 못했다. 어차피 거절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굳이 애타는 환자와 환자 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가슴 아플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 용기 없음의 짐은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있다. 그때 그 환자는 아직 살아있을까? 부디 나보다 인격이 훌륭한 기증자를 만나 살았을 거라 믿고 싶다. 얼마 전 동생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항암 치료를 받으며 머리가 빠진 아이들에게 가발을 만들어주는 곳에 기증했다고 한다. 며칠 전 한국에서도 소아암 환자들에게 머리카락을 기부한다는 뉴스를 보게 됐다. 잘라봐야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머리카락 기증 정도로 내 마음의 빚이 얼마나 줄어들겠냐만은 돈으로 하는 기부가 가장 쉬운 기부라더니 이까짓 거 자르는데도 나름 갈등했다. 자르기 전에는 고민이었지만 자르고 나선 홀가분하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의 무게는 116그램. 손에 쥐어보니 묵직하다. 이걸 달고 다니느라 내가 맨날 뒷목이 당겼나.아침에 일어나는데 정말 가뿐하게 머리가 들렸다.
사랑은... 결심하는 것이다. - 2014년 1월 카카오 스토리에 올렸던 글
처음에는 한국 단체에 기증하려고 했다. 그런데 알아보니 한 번이라도 펌이나 염색을 한 머리는 가발 제작 과정에서 약품처리를 하면 녹아버리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고 했다. 미용실은 거의 가지 않지만 숱이 많고 뻣뻣한 머리가 반곱슬이기까지 해서 1년에 한 번 정도는 스트레이트 펌을 했던 나는 좌절했다. 동생이 기부한 Locks of Love를 알아보니 제작 방법이 다른 것인지 약품이 다른 것인지는 몰라도 탈색 (블리치)한 모발이 아니면 염색과 펌을 했어도 모두 기증 가능하다고 했다. 그 뒤로는 계속 Locks of Love에만 기증을 하고 있다. 물론 최대한 손상되지 않은 모발을 기증하기 위해 처음 짧게 잘랐을 때만 스트레이트 펌을 하고 머리가 일정 길이로 자라면 그냥 묶고 다닌다. 염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어릴 때는 그렇게 싫어했던 숱 많은 머리, 굵고 뻣뻣한 머릿결, 새까만 머리색이 이제는 감사하다.
예전에 기부를 많이 하는 어떤 유명 인사가 기부에도 중독성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20대에 세웠던 인생의 큰 그림 속에는 50세 이전까지 돈을 많이 벌어서 일찍 은퇴하고 50세 이후부터는 사회에 환원하는 삶을 산다는 계획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빌 게이츠처럼 대단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꿈꾸었었나 보다. 50이 넘을 때까지 기다리기엔 내 성질이 너무 급하다 보니 모발 기증을 포함해 여기저기에서 소소한 기부나 결연 맺기 등을 시작했다. 해보니 맞다. 기부에도 중독성이 있다. 주면 줄수록 기쁘고 보람되고 무엇을 더 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자동 이체를 해놔서 매달 빠져나가는 돈을 인식도 못하고 지내지만 컴패션에서 1대 1 후원으로 맺어진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서 소식이 올 때면 기쁘고 반갑다. 7살 때 나의 첫 결연 아동이 된 인도네시아의 에핀은 이제 18살의 아가씨가 되었다. 중학생 때부터 크리스마스와 생일 선물 챙기기를 했던 한국의 아동은 이제 19세의 성인이 되어 보육원을 떠나 사회로 나갔다. 유니세프의 임산부 후원을 하고 나니 지나가는 임산부나 갓난아기들을 보면 내 마음이 따뜻하다. 아이들이 싫다고 독신주의를 고집했고 남편의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한 뒤에도 딩크를 선언했던 내가 이렇게 변했다.
유독 바빠서 휴가를 한 번도 쓰지 못하다가 한겨울에 몰아서 한 달 정도를 쉰 적이 있다. 그때 세이브 더 칠드런의 모자 뜨기에 동참했다. 태어나자마자 감싸줄 천과 모자가 없어 저체온증으로 아기가 사망하다니 축복받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안 되는 비극이다. 그 전에도 시간 날 때면 아기 모자를 한두 개씩 떠서 보냈었는데 한 달 동안의 휴가 내내 100개를 떠보겠다고 목표를 세워 도전하긴 처음이었다. 정말 열심히 했지만 결과는 60개. 그래도 기뻤다. 가장 기억에 남는 휴가 중 하나다. 같은 해 어느 온라인 쇼핑몰에서 1년 동안 가장 높은 판매량을 보인 제품들의 순위를 발표했는데 놀랍게도 1위가 세이브 더 칠드런의 아기 모자 뜨기 키트였다. 세상에는 중독자들이 참 많다. 이런 중독자들은 매일매일이 감사하다. 기부는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에게 더 큰 행복을 준다. 마치 사랑처럼. 이번에 머리를 자르면서 다시 읽어본 카카오 스토리에 내가 썼던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사랑은 결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