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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로하스 Polohath Nov 24. 2020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도서관에서 아들들에게 읽어줄 책을 빌려왔다. 얼마 전 시끌시끌했던 그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이다. 1971년에 덴마크에서 출간되어 덴마크 문화부 아동도서상을 받았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동 성교육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우수한 작품이다. 검증된 도서이니 여성부도 이 책을 나다움 어린이책으로 선정하고 일부 초등학교에 배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분노했고 결국 책은 모두 회수되었다.

아들들이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이다. 자신들이 엄마 뱃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엄마 아빠가 결혼해서 아기를 만들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체 결혼이 무엇이길래 아빠랑 엄마가 같이 만든 아기가 엄마 뱃속에만 들어가 있는지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하나님이 만들어서 엄마한테 넣어주신 건가 보다고 알아서 결론을 내린 듯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불가능이란 없으니 이럴 때 하나님의 존재는 퍽이나 유용하다.

남자 형제도 없이 자란 나는 아들들의 성교육에 대해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남편은 여느 한국 아빠들과 똑같은 반응이다. 크면서 저절로 다 알게 된단다. 맞는 말이다. 나도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바른 성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상당히 위험하고 잘못된 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고등학교 때 미국에 간 뒤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은 뒤에야 성의식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었다.

한국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때 받은 성교육은 대략 이랬다. 순결은 여성이 지켜야 할 지상 최고의 과제였다. 성폭행을 당하지 않도록 옷차림에 조심해야 하고 가족 외의 남자는 다 잠재적 도둑놈이며 성폭행범이었다. 선량한 남성 모두를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교육이자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게도 "조신하지 못한 죄"를 묻게 만드는 엉망진창 교육이었다. 그땐 멋모르고 그런 교육들을 그대로 수용해 꽤 오랫동안 그것이 진리인 줄 알고 살았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하고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고등학교 1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미국에 간 뒤 몇 개월 만에 첫 성교육을 받게 되었다. 남녀 학생이 한자리에서 교육받는다는 것에서부터 나는 불편했다. 영어가 서툰 학생들을 위해 선생님이 어려운 단어 대신 제스처로 묘사하며 설명하는데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책상 위에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모두 피임 도구들이었다. 태어나서 그런 물건들을 처음 본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피임 도구들에 대한 설명이었다. 단순히 사용 방법과 피임률을 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실용성 측면을 강조했다. 남성용 콘돔은 피임과 성병 예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고 가격이 저렴하며 쉽게 구할 수 있어 가장 좋은 선택이긴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은 로맨틱하지 않다고 했다. 뜬금없이 로맨틱이라니 황당했다. 내가 못 알아듣고 뜨악한 표정을 짓자 선생님이 갑자기 껴안고 키스하는 제스처를 취하시다가 잠깐만 기다려, 하고는 콘돔을 착용하는 과정을 표현했다. 즉 중간에 열정의 맥이 끊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설명을 들으며 내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그러나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충격적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기억이다.


삽화가 너무 적나라하다는 비판과 함께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문제시되었던 것은 "재미있거든"이라는 구절이다. 성관계를 재미있다고 묘사함으로써 어린이들에게 호기심을 유발하고 조기 성경험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때 선생님과 어르신들이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는 거라고, 공부할 때가 제일 좋은 때라고 하셨어도 공부하기 정말 싫던데.

책을 읽어주기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두 아들에게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냐고 물었더니 둘째는 천진난만하게 결혼해서요 라고 대답했고 첫째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있는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요 라고 대답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어떻게 엄마 뱃속에 들어갔을까 물어보자 첫째가 잠깐 생각하더니 뽀뽀해서요 라고 다시 대답했다. 엄마도 너희들이랑 맨날 뽀뽀하지만 아기 안 생기는데? 하자 그제야 갸우뚱했다. 어떻게 생기는지 이 책에 나오는데 같이 읽어볼까? 하니 둘 다 기대감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셋이 함께 책을 보는 시간은 즐거웠다. 궁금증이 해결된 아들들은 재미있어했고 나에게도 아빠와 똑같은 몸이 있지만 아직 작아서 아기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밥도 많이 먹고 아빠처럼 더 키가 커져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첫째는 어떤 근거에서인지 아기는 24살에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출산 장면을 그린 장면을 볼 땐 징그럽다고도 했다. 책을 다 읽고 궁금증이 해결된 뒤에는 아무런 충격도 불편함도 민망함도 없었다. 아들들에게 아기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라는 책은 공룡은 어떻게 멸종됐을까 와 다를 바 없는 그저 알기 쉬운 이야기책일 뿐이었다.


책을 빌리기 전 도서관에서 혼자 읽어보았을 때 약간은 망설였다. 성관계를 묘사한 삽화가 상당히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문란하거나 외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아들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결국 이 책을 읽어주기로 결정한 이유는 앞부분에 나오는 문장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가 언제나 아기와 함께 사는 건 아니야.

무려 30년 전에 쓰인 책 속에 이토록 배려심 깊은 문구가 있다는 것은 감동이었다. 정말로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고민하며 쓴 책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부모들이 이 책에 관한 나의 의견을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추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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