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아빠와 친했다. 맞벌이 부부가 흔치 않던 시절 맞벌이를 하셔서 학년이 바뀔 때마다 학부모 참관일이 되면 엄마 대신 아빠가 오셨다. 아빠가 온 아이는 전교에서 나뿐이었는데 그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빠를 발견하자마자 아빠! 소리치며 뛰어가서 안기면 주변에 서있던 엄마들이 깜짝 놀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5학년 때 처음으로 공처가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피아노 학원으로 아빠가 데리러 오셔서 함께 손잡고 집에 왔다는 내용을 일기에 썼는데 담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너는 학원에 아빠가 데리러 오냐?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학급을 향해 얘들아, 공처가라는 말이 뭔지 아니? 라며 비웃었다.
그 담임은 그때도 아이들이 모두 싫어하는 교사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 말종이라는 표현도 아까울 범죄자였다. 대놓고 눈치를 주며 촌지를 요구해도 학부모 참관일 외에는 단 한번 학교에 가지 않는 우리 부모님과 나를 미워한 건 애교에 가까웠다.
사립 초등학교 학생인 우리들에게 어처구니없는 우월감을 주입시키며 툭하면 너희들은 공립학교 다니는 가난한 것들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다. 어린 마음에도 왜 저러나 싶었고 경멸하는 마음이 생겼다. 당장 내 동생부터도 공립 다니는데 어쩌라고. 우리 학교 추첨에서 나는 붙고 동생은 떨어진 게 죄라도 되단 말인가.
그때는 잘 몰랐지만 가난에 대해 지속적으로 혐오를 주입한 이유에는 부자 학부모들답게 담임인 자신에게도 돈 좀 더 쓰라는 강요가 섞여 있었던 것 같다. 남녀 학생 모두에게 성추행까지 일삼았으니 요즘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Latte is a horse를 꼭 붙이고 얘기해야 한다.
예체능이 특히 강했던 사립학교라 최소 은수저 이상은 되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일반 스테인리스 수저인 내가 저런 범죄자 담임까지 만나면서도 상처 받거나 주눅 들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부모님의 가르침과 독서 덕분이었다.
아빠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수학 머리가 가장 뛰어나신 분이다. 서울고등학교 재학 시절, 선생님께서 꼭 수학 전공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는데 아빠는 별 생각이 없으셨다고 한다. 6.25 때 아버지가 실종되고 홀어머니가 바느질 품을 팔아 6남매를 키우는 환경에서 학업보다는 생계가 더 급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당연하다는 듯이 서울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내로라하는 수재들 사이에서도 별다른 노력 없이 수학 1등이라 오히려 별 매력을 못 느끼셨을 수도 있다. 내 기억에는 공부를 아주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셨다. 순전히 타고난 두뇌와 재능이었다.
몇 년 전 한국에 오셨을 때 친지들이 모였는데 중학생 조카가 수학 문제를 들고 왔다. 영어 교사인 자기 아빠도 못 풀었다며 내게 가져온 건 나름 나를 똑똑하게 봐준 거라 고마웠지만 막상 문제를 보는 순간 앞이 캄캄했다. 수학이 아주 뛰어나진 않았어도 학창 시절 수학 상위권은 유지했었는데 전혀 기억이 안 났다. 할아버지가 수학 천재신 거 알지? 하고 설레발을 치며 조카를 아빠 쪽으로 보냈더니 정말로 풀어버리셨다. 암산으로.
아빠는 수학 재능이 뛰어난만큼 문과 쪽으로는 전혀 소질도 관심도 없으셨다. 아빠가 유일하게 읽으시는 활자는 신문뿐이다. 아빠는 오히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과 수년이 지나도 그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이 더 신기하다고 하신다. 언변도 대화의 스킬도 없으시다. 오히려 고지식한 화법 때문에 일을 그르치실 분이다.
언변이 뛰어나신 것도 아닌데 융통성도 없으셨다. 엄청 깔끔하신 성격에 술 담배도 안 하신다. 술을 안 드시는 분이 결벽까지 있으니 유흥업소라면 치를 떠셨다. 이런 분이 꽤 괜찮은 직장을 관두고 장사를 하시겠다는데 잘 될 리가 없다. 한국에서는 장사 실패 정도였지만 미국에 와서는 언어장벽까지 겹쳐 한국에서 처분해 가지고 온 전재산을 1년 만에 사기꾼 교포에게 모두 가져다 바치셨다.
경제적 능력도 없고 영어도 못하시는 아빠에게 기댈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보니 알아서 내 삶을 개척해야 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시절 내내 공부한 시간만큼이나 일을 하며 살았다. 점심값을 아끼느라 마트에서 가장 싸고 배부른 과자를 대용량으로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었다. 돈도 없었지만 시간도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먹는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학비를 낼 수 있었다.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겠냐고 내게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그만큼 미국 생활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아빠에 대한 사랑과 안쓰러움은 더욱 절절해졌다. 답답함과 원망도 컸고 고지식함과 센스 없음에 짜증도 많이 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정시에 기상해서 정시에 일을 시작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 않겠다는 양심과 성실함에 대한 존경 또한 컸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열심히 서로를 사랑했던 우리 집 두 딸들은 여전히 아빠와 친하다. 아빠와 친한 딸들이 자존감과 사회성이 높다는데 그냥 높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지들이 제일 잘 난 줄 아니 문제다. 우리 집안은 친척들끼리도 모두 사이가 좋고 성향이 다 비슷한 편이라 모이면 한없이 수다 떨다가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말한다. 잘난 척하는 거 보니 우리 핏줄 맞는구나.
칠순을 넘기신 아빠는 여전히 매일 아침 일어나 맨손 체조부터 하신다. 군대에서 배운 뒤 50년간 단 하루도 빼먹지 않으셨다. 몇 년 전부터 매일 수영과 헬스도 하신다. 술 담배는 평생 안 하셨다. 무알콜 맥주도 안 드신다. 전혀 늘지 않는 영어 실력이 안타까워 수업이 열리면 열심히 찾아다니신다. 얼마 전에는 LA카운티에서 지원까지 받아 대학 수업을 등록하시고는 힘들다고 괜히 했다고 하소연도 하셨다. 아무리 한인타운에 사셨다고 해도 미국 생활이 몇 년째인데 어쩌면 저렇게 영어가 안 되시는지 모르겠다. 두뇌 용량의 92% 정도가 수학 쪽에 편중되어 있나 보다.
딸은 아빠 닮은 사람과 결혼한다더니 비슷한 남편을 만났다. 아빠를 보고 자란 나는 남자들은 다 뭐든 잘 고치는 줄 알았고 남편을 만난 뒤로는 그 믿음이 더욱 공고해졌다. 공부 머리 좋은 것도 비슷하다. 이과 머리가 좋은 만큼 언변도 서툴고 책도 안 읽고 영화를 보면 스토리를 금방 까먹는 것까지 똑같다. 나보고 넌 그게 뭐 중요하다고 영화 내용을 몇 년 지나서까지 기억하냐고 묻는다. 그게 중요해서 일부러 기억한 게 아니라 그냥 생각이 나는 건데 이런 식으로 물으면 당황스럽다. 좋은 아빠인 것도 똑같다. 나의 두 아들은 엄마보다 아빠와 더 친하다.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은수저 속 스테인리스 수저, 그중 몇 년은 흙수저로서의 경험까지 있었던 남편과는 초등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는 기쁨이 있다. 그 위에 덧붙여 수시로 그에게서 아빠를 발견하는 일은 때론 신기하고 때론 기쁘고 많은 경우 속 터진다.
오늘도 남편은 어제부터 갑자기 삑삑 소리가 나는 식기세척기 수리에 도전하는 중이고 아빠는 코로나 이후 미국에 갈 수 없는 나를 대신해 중요한 일처리를 해주셨다. 말 안 통하고 센스 없어 속 터질 때가 많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내 인생의 보배 같은 남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