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장례식에 간 적도 몇 번 없고 차례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집안에서 자란 나는 내 역할이 무엇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그저 어머님과 남편이 하는 대로 따라다니기 급급했다.
오랫동안 지병을 앓으셨고 그동안 어머님이 고생하신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던 가족들은 담담한 편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 밑바닥에는 슬픔, 애증, 죄송함, 섭섭함 같은 것들이 녹아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워낙에 서로에게 막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이였다. 그러다보니 어머님은 조문 온 지인들이 위로의 말을 건넬 때조차 난 이제 고생 끝이야, 날개 달았어, 하며 큰소리를 치셨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남편 잃은 상실감을 나타내지 않으려는 어머님의 몸부림 같은 것이 느껴져 더욱 안쓰러웠다.
친엄마는 자식에게 그만 먹으라고 하고 새엄마는 더 먹으라고 한다는 말이 기억난다. 살찔까 봐, 건강을 해칠까 봐 하는 말이지만 같은 의도라도 새엄마가 말하면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말이다. 그만 먹으라고 잔소리하고 말 안 들으면 쫓아낸다고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모질게 말해도 그 진심과 사랑을 오해받지 않을 친엄마뿐이다. 고인을 향해 나 그렇게 고생시키더니 잘 갔어, 난 이제 자유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어머님뿐이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진짜 속마음을 오해받지 않을 단 한 사람, 그의 아내.
아버님의 임종을 알릴 때 남편의 목소리는 떨렸었다. 이미 혼자 울고 나서 나에게 알린 것이 분명한 목소리였는데 자기 많이 슬프지? 울었어? 하고 묻자 울긴 뭘, 워낙에 편찮으셨는데, 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입관할 때 시누이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울지 않던 나도 울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아버님 때문이 아니라 시누이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누이처럼 맘 놓고 통곡도 못 한 채 의연한 척 꿋꿋이 버티고 서있는 남편이 딱해서였다. 울면서 남편에게 기댔더니 큰 아이가 따라 울고 남편도 훌쩍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남편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런 것이 부부구나, 라는 생각이 내 심장을 마구 두드렸다.
얼마 전부터 아버님께서 갑자기 수목장을 마련하시겠다고 하셔서 남편과 시누이는 급한 일도 아닌데 왜 그러시냐며 말렸었다. 그런데도 지난주 우리 네 식구가 속초에 있을 때 어머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아버님이 오늘 당장 수목장 계약해야 한다고 서두르시는데 아들은 속초에 있다고 하자 어머님을 닦달해 기어이 두 분이서 가시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수목장을 계약하고 사흘 뒤, 아버님께서는 먼 길을 떠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정 사진까지 미리 찍어두셨었다.
4일장을 마치고 부모님 댁에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버님께서 마지막까지 아들 고생하지 말라고 다 준비해놓고 가셨네, 말하고는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무방비 상태였던 남편도 내가 울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말없는 서로의 눈물 속에 관통하는 느낌이 있었다. 결혼 11년 차에 이제야 진짜 부부가 된 것 같았다. 일심동체, 이심전심, 부창부수라는 말들이 이런 느낌인가 보다.
결혼할 때 대부분의 신부들이 상상하는 것은 결혼식이지 결혼 생활이 아니다. 결혼 생활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고 백마 탄 왕자 같던 신랑은 미운 짓만 하는 아저씨가 되어 간다. 신혼 때는 서로 지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싸웠고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아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넘쳐 작은 것에도 서로에게 예민했다. 그런 과정들이 지나고 이제 서로의 성향을 바닥까지 다 알게 된 지금, 연애 시절의 불타오르는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큰 아픔을 겪을 때 말없이, 그러나 누구보다 깊숙이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동지애가 자리 잡았다.
말없이 꼭 잡은 손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아픔을 조금이나마 분담할 수 있는 사이, 부부.
지난 11년간 내가 아내로서 그에게 어떤 역할을 해왔을까 생각하다가 이번에 깨달았다. 그가 눈물 흘릴 때 옆에 있어준 것이 아내가 된 뒤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