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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로하스 Polohath Nov 20. 2020

단 한 사람, 그의 아내


얼마 전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다른 사람의 장례식에 간 적도 몇 번 없고 차례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집안에서 자란 나는 내 역할이 무엇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그저 어머님과 남편이 하는 대로 따라다니기 급급했다.


오랫동안 지병을 앓으셨고 그동안 어머님이 고생하신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던 가족들은 담담한 편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 밑바닥에는 슬픔, 애증, 죄송함, 섭섭함 같은 것들이 녹아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워낙에 서로에게 막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이였다. 그러다보니 어머님은 조문 온 지인들이 위로의 말을 건넬 때조차 난 이제 고생 끝이야, 날개 달았어, 하며 큰소리를 치셨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남편 잃은 상실감을 나타내지 않으려는 어머님의 몸부림 같은 것이 느껴져 더욱 안쓰러웠다.


친엄마는 자식에게 그만 먹으라고 하고 새엄마는 더 먹으라고 한다는 말이 기억난다. 살찔까 봐, 건강을 해칠까 봐 하는 말이지만 같은 의도라도 새엄마가 말하면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말이다. 그만 먹으라고 잔소리하고 말 안 들으면 쫓아낸다고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모질게 말해도 그 진심과 사랑을 오해받지 않을 친엄마뿐이다. 고인을 향해 나 그렇게 고생시키더니 잘 갔어, 난 이제 자유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어머님뿐이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진짜 속마음을 오해받지 않을 단 한 사람, 그의 아내.                                               






아버님의 임종을 알릴 때 남편의 목소리는 떨렸었다. 이미 혼자 울고 나서 나에게 알린 것이 분명한 목소리였는데 자기 많이 슬프지? 울었어? 하고 묻자 울긴 뭘, 워낙에 편찮으셨는데, 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입관할 때 시누이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울지 않던 나도 울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아버님 때문이 아니라 시누이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누이처럼 맘 놓고 통곡도 못 한 채 의연한 척 꿋꿋이 버티고 서있는 남편이 딱해서였다. 울면서 남편에게 기댔더니 큰 아이가 따라 울고 남편도 훌쩍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남편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런 것이 부부구나, 라는 생각이 내 심장을 마구 두드렸다.


얼마 전부터 아버님께서 갑자기 수목장을 마련하시겠다고 하셔서 남편과 시누이는 급한 일도 아닌데 왜 그러시냐며 말렸었다. 그런데도 지난주 우리 네 식구가 속초에 있을 때 어머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아버님이 오늘 당장 수목장 계약해야 한다고 서두르시는데 아들은 속초에 있다고 하자 어머님을 닦달해 기어이 두 분이서 가시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수목장을 계약하고 사흘 뒤, 아버님께서는 먼 길을 떠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정 사진까지 미리 찍어두셨었다.


4일장을 마치고 부모님 댁에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버님께서 마지막까지 아들 고생하지 말라고 다 준비해놓고 가셨네, 말하고는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무방비 상태였던 남편도 내가 울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말없는 서로의 눈물 속에 관통하는 느낌이 있었다. 결혼 11년 차에 이제야 진짜 부부가 된 것 같았다. 일심동체, 이심전심, 부창부수라는 말들이 이런 느낌인가 보다.                                              

                                                                                                                                                           

결혼할 때 대부분의 신부들이 상상하는 것은 결혼식이지 결혼 생활이 아니다. 결혼 생활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고 백마 탄 왕자 같던 신랑은 미운 짓만 하는 아저씨가 되어 간다. 신혼 때는 서로 지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싸웠고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아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쳐 작은 것에도 서로에게 예민했다. 그런 과정들이 지나고 이제 서로의 성향을 바닥까지 다 알게 된 지금, 연애 시절의 불타오르는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큰 아픔을 겪을 때 말없이, 그러나 누구보다 깊숙이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동지애가 자리 잡았다.


말없이 꼭 잡은 손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아픔을 조금이나마 분담할 수 있는 사이, 부부.


지난 11년간 내가 아내로서 그에게 어떤 역할을 해왔을까 생각하다가 이번에 깨달았다. 그가 눈물 흘릴 때 옆에 있어준 것이 아내가 된 뒤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다.   



                                           

(아버님의 절친께서 쓰신 편지는 관속에 고이 넣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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