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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로하스 Polohath Nov 13. 2020

아프더라도 사랑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매장에 안 나가보는 편이다. 어차피 부업이야 라는 마인드가 깊이 박힌 지 몇 년 되어서인지 갑자기 직원이 그만두고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출퇴근해야 할 때면 뭔가 억울하고 이게 아닌데 싶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나 얼토당토않는 투덜거림과 게으름이 폭발한다.

오늘내일은 매출이 높을 것 같은 주말인 데다가 마감 시프트라 몸이 좀 고달프겠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출근했는데 출근할 때까지도 사막처럼 뜨겁던 태양은 어디 가고 오후 늦게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해 행인도, 손님도 딱 끊겼다. 여느 때라면 매출 부진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해야 할 것을 오늘은 빗소리가 좋다는 생각만 들었다. 매장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비를 맞아가며 빗방울 사진도 찍었다. 사람의 기분이라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천둥 번개까지 친 폭우가 한바탕 지나가고 빗줄기가 약간 수그러들었나 싶었을 때 한쌍의 남녀가 매장에 들어왔다. 커피 두 잔,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동시에 카드를 내미는 남자의 손은 무언가에 쫓기듯 성급했다. 표정은 잔뜩 화가 나 있었지만 눈빛은 애처로울 만큼 불안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슬퍼 보였다. 그 와중에도 커피만 시키는 여자를 돌아보며 "뭐 먹을래?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다면서?" 하고 챙기기를 잊지 않는다. 여자는 먹고 싶지 않다고 힘없이 말하며 창가 자리에 먼저 앉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그러나 남자의 언성이 높아지면서 듣지 않으려 해도 듣게 되었고 파악하지 않으려 해도 상황은 바로 파악되었다.

"오빠, 그런 게 아니야... 무시한 거 아니야..."
"무시하는 게 아니면 뭐야! 왜 연락이 안돼! 왜 톡을 보고도 답장을 안 해! 적당히 놀아야지 왜 남자들하고 술만 마시면 연락이 끊겨!"
"일어나려고 했는데... 붙잡혀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
"넌 항상 핑계밖에 없지! 이번이 다섯 번째야 다섯 번째!!!!"
"핑계가 아니라..."
"내가 너 못 놀게 해? 놀아도 돼! 난 내가 깨끗하게 노니까 당연히 너도 그럴 거라고 믿고 너 의심 안 해. 믿었다고!!!"

오, 이런. 이거 너무 뻔한 스토리 아닌가.
남자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안 듣는 척하면서 모든 신경을 두 사람에게 곤두세우고 있던 나와 매장의 다른 손님들은 말없이 이심전심으로 남자의 분노에 공감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또 공감했을 것이다. 남자의 분노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이유는 화가 나서라기보다는 상처 받아서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놓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불쌍하고 비참해서라는 것을.

"내가 너 다시는 안 보고 그냥 끝내려고 하다가 이번에는 무슨 핑계를 대는지 궁금해서 마지막으로 만난 거야!"

아니다. 그 말은 남자가 마지막 자존심을 붙잡고 버둥거리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남자는 핑계가 듣고 싶어 만난 것이 아니라 내가 널 용서할 수 있게 해 줘.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해 줘,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남자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가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한심하고 성의 없는 것들 뿐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다 내가 잘못한 건데 뭐. 할 말 없어. 무슨 말을 하라고. 내가 말해도 어차피 오빠가 안 믿을 거면서. 나 연락 잘 못 하는 거 알잖아.

듣고 있는 내가 다 화가 난다. 그럴듯한 이유를 체계적으로 프레젠테이션 해도 모자랄 판에 다 내 잘못이라 할 말이 없다 라니. 여자끼리의 직감으로 안다.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남자를 불안하게 하고 아프게 할 여자다.

용서는 어쩌면 사랑보다 어려운 일이다. 남자는 지금 그 어려운 일을 하고자 한다. 이미 다섯 번이나 실망하고 상처 받았으면서도 내가 널 용서할 수 있게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봐,라고 절규하고 있다. 그 마음을 여자가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저렇게 성의 없는 대답으로 일관하지는 못할 텐데.

제대로 된 설명은 하지 못했지만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는 여자의 태도에 남자는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들리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내 귀에 정확히 박힌 남자의 한마디 "너 다음에 또 한 번만 그러면 그때는 정말..." 목이 멘 듯한 말투.
그랬다. 사랑이 이겼다. 이번에도 역시.

기대가 없으면 상처도 없는 법이거늘 남자는 다시 한번 여자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쪽을 택했다. 아니, 택한 것이 아니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억울하단다. 그런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 카운터로 와서 내게 냅킨을 달란다. 눈물을 닦기 부족함이 없도록 넉넉히 주었는데도 남자가 자리로 돌아가려다 말고 다시 내게로 돌아서더니 손으로 냅킨을 비벼보면서 물었다.

"좀 더 부드러운 휴지 없나요?"

내 마음 한편이 찌르르 울렸다. 사랑이구나.
천 갈래 만갈 레 찢어져 피 흘리는 본인의 가슴보다 혹여라도 거친 냅킨에 쓸릴지 모를 그녀의 피부가 더 걱정되는 마음.
지금 드린 그 냅킨이 가장 부드러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설령 더 부드러운 티슈가 있었어도 아마 안 주었을 것이다. 대책 없는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 딱한 남자에게 이미 다섯 번이나 배신의 상처를 입힌 여자가 미워 내 나름 소심한 징계를 내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정신병이다. 내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의 말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장착되어 이 세상에 태어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이익과 안전이 최우선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이러한 본능과 유전자를 이기는 강력한 정신병이 발동한다. 누가 봐도 상대방이 잘못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다 그 사람을 버리라는데 당사자만 혼자 정신을 못 차린다. 잘못한 것도 없는 내가 미안하고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 같고 내 마음이 아프다.

그 여자는 괘씸했으나 그렇게라도 함께 하는 것이 더 큰 기쁨일 그 남자의 용서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언젠가 진짜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시간이 흘러 저절로 콩깍지가 벗겨지고 정신병이 치료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래도 희망이라면, 갈기갈기 찢어졌을 남자의 아픈 가슴이 치유될 작은 희망이 하나 있다면, 사랑할 때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이지만 사랑이 끝나고 나면 더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강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후회란 지옥에 떨어진 채로 놓쳐버린 천국을 올려다보는 심정이라고 했다. 아프더라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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