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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스락 Jan 05. 2024

자신 없지만, 용기를 내어본다.

금요일의 문장 (24.01.05)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과거를 내려놓지 못하는지, 혹은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선의 일화가 있다. 탄진이라는 선승이 에키도라는 승려와 함께 폭우가 쏟아진 뒤 몹시 진흙탕으로 변한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을 근처까지 오자 그들은 길을 건너려는 젊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런데 진훍탕이 너무 깊어서 입고 있는 비단 기모노가 더러워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탄진은 곧바로 그녀를 등에 업고 길 반대편으로 데려가주었다.
그 후 두 수도승은 침묵 속에서 발걸음을 계속했다. 다섯 시간 뒤, 그날 밤 머물게 될 절이 보일 때쯤 에키도가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왜 그 처녀를 등에 업고 길을 건너다 주었는가? 우리 수행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걸 모르는가?"찬탄잔이 말했다."나는 몇 시간 전에 그 처녀를 내려놓았는데, 자네는 아직 그녀를 업고 있는가?"

출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툴레 저/류시화 역


나의 문장


행복했던 기억보다 불행했던 기억이 오래 살아남는다.

행복했던 순간보다 힘들었던 순간의 피사체가 선명하다.


마음은 행복을 좇지만, 기억은 아픔으로 가득 채워진다.


자아, 나의 자아는 나를 떠나 통제가 안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 결국 스스로 상처를 남긴다.

타인으로부터 시작된 상처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이유는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곱하기 때문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삶은 꼭 숙제 같은 감정을 던져주고 배시시 웃는다.

아픔의 연결고리는 지독해서 하나가 엉키기 시작하면 또 다른 하나가 찾아와 서로 합을 맞춘다.

촘촘하게 엉켜 버린 아픔은 마음에 성을 쌓고 문을 닫아 버린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기방어를 시작한다.




4년이란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사직서를 제출했던 그날 이후 정확히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날 사직서 처리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발령 후 인수인계로 정신없는 새해, 하루를 뜬 눈으로 보내고서야 '23년 나의 업무는 마무리되었다.


15년 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한 새벽 출근.

(걸어서 10분 거리 사무실을 버리고, 대중교통 1시간 이상 소요되는 가산동 출근)

설레는 사무실 입성, 같은 회사 직원이지만 얼굴도 이름도 낯선 사람들, 마치 경력직 재입사 기분이랄까~


낯선 분위기에서 만난 익숙한 얼굴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발가락에 힘들 주며 한 발 한 발 전진한다.

다행히 친한 팀장의 활짝 웃는 얼굴과 가벼운 포옹으로 긴장이 풀린다.

왜 왔냐는 동료의 장난기에 경직된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그러나 내가 넘어야 할 커다란 산!! (4년 전 사직서를 쓸 수밖에 없었던 팀장 지금은 실장님)

믿음이 큰 만큼 실망과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똑" "똑"

"안녕하세요, 인수인계 때문에 가산동 출근이 늦어졌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의 용기와 초조함, 떨리던 심장, 마주할 수 없는 어색한 기분)

"그래서 인수인계는 마무리하고 왔어요" 

"네 잘하고 왔습니다"

"앉아요"


------------- 침묵


(두근두근 심장은 어느새 평온해졌고 담백하리만큼 감정이 차분해졌다)

"왜 왔어요, 나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그리고 '파란색' 팀장도 있잖아"

('파란색' 팀장 앙숙에서 인연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과정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일하러 왔습니다" "잘해보겠습니다"

"일이야 잘하는 거 알지, 근데 내가 있는데 상관없겠어요"

"편하게 일할 수 있겠어요."

"제 행동이 서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내가 뭐 그런 행동에 신경 쓸 사람이야" 

"그냥 의아해서 폭탄이 두 개나 있는데 스스로 왔다는 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이야기할 타이밍이 없기도 했구요"

(처음 실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느꼈던 차가운 공기는 어느새 촉촉한 연민의 감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O 책임님(남편)도 지방 발령 났던데, 괜찮겠어"

"몇 달 후 가산동 사무실도 그쪽으로 옮기지만, 몇 달은 힘들겠네"


"괜찮습니다" 

"그래요, 앞으로 일 잘 부탁하고 내 성격 알죠, 나는 일 잘하는 사람 좋아해요."

(실장님 눈빛이 반짝였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눈빛이었다)


"감사합니다"

"저 이동한다고 했을 때 내치지 않고 받아주셔서" 


"마다할 이유 없지" "말했잖아, 일 잘하는 사람 좋아한다고" (웃음)





과거로 돌아가 팀장님(지금 실장님)과 나는 두 아이의 엄마, 매달 초 새벽까지 결산을 같이했던 워킹맘.

팀장님 워커홀릭은 넘사벽이었으며, 회사와 가정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우리는 투덕거리며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 아닌 친구가 되었다.


일에 대한 열정, 추진력, 압도적인 카리스마 모든 게 완벽했지만, 마음 나눌 사람은 없었다. 같은 워킹맘 입장에서 그 모습이 외롭고 애처로워 보여 주제넘게 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다.


가장 인정 받고 싶은 사람에게 듣고 싶은 한마디 '잘했다.' '고생했다.' 그러나 끝까지 회사업무에 대한 나의 성과는 인정하지 않았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나의 인사에도 흙탕물을 끼얹어 스스로 모든 걸 포기하게 했다. 나는 그저 힘들 때 어깨를 내어주고 감정을 토해내는 대나무 숲으로 옆에 있어 주길 원했던 사람이다.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기억을 가장 많은 눈물을 쏟게 했던 사람. 

'잘했다.' 대신

'미안하다, 하지만 너를 위해 그랬다.' '내 진심을 모르는 너는 나를 제대로 아는 게 아니다 서운하다.'

그 대화를 끝으로 나는 사직서를 제출했고 그렇게 4년이 지났다.

아마도 나는 일이 아닌 사람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동안 서로를 그림자처럼 피해 다녔던 우리는 긴 시간의 벽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화로웠다.

내 마음의 상처는 서운함으로 시작해서 원망으로 미움으로 그리고 무시로 변질되어 갔다.


지독한 인연의 끈을 새로 써보고 싶다.

내가 차곡차곡 쌓아갔던 불행하고 힘들고 억울했던 기억을 단칼에 베어 버릴 순 없지만 행복했던 기억과 

위로가 되었던 순간들을 조금씩 꺼내어 마음의 행복을 키워볼 생각이다.

행복했던 작은 기억에 용기를 내어 보고 싶다.



한 줄 요약 : 사실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힘들었던 순간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해 봅니다.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금요일에 문장#친구#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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