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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스락 Nov 16. 2023

수능

꿈 많던 소녀

밤 기차를 타고 도착한 목포의 새벽 공기는 달았다. 어깨는 무겁지만, 기분은 다디단 하루의 시작이었다.

결과야 어찌 됐든 수능을 보러 왔으니, 소원 하나는 이룬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크게 숨을 들이마셔

본다. 목포항구에서 불어온 바람에 비릿한 바닷냄새가 먼 길 잘 왔다고 나를 위로하듯 살랑살랑 일렁인다.


'95년 11월 22일 가방에 문제집 몇 권과 필구도구 몇 자루를 챙겨 들고 수원에서 목포행 기차를 탔다. 나의 

목적은 수능이었다. 이대로 수능을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고, 누군가 원망하며 살아갈 시간이 불현듯 두려워졌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취업을 했던 그해 엄마는 목구멍을 통해 튀어나오기를 거부하는 그 말을 한 번은 해야 한다는 절박으로 끄집어낸다. "대학 안 갈 거야" 말의 무게가 어찌나 무거웠는지 엄마는 그대로 땅 위에 굳어 버릴 것 같았다. 내 눈조차 마주하지 못하는 엄마의 망설임. "엄마 내가 돈 벌어서 꼭 대학교 갈랑께 꺽정하지 마러" 엄마는 쉽게 돌아서지도 그렇다고 잘 가라고 내 곁에 와서 나를 안아 주지도 않았다. 텁텁한 억지 미소가 엄마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나는 엄마를 꼭 안아드리고 가서 열심히 돈도 벌고 공부도 할 거라고 공부를 포기한 게 아니라고 다시 한번 엄마를 안심시키고 버스에 탔다. (목포 → 수원) 나의 홀로서기.


다시 수능을 보러 갔던 그날로 돌아가서, 목포역에서 간단히 허기를 채우기 위해 라면을 시켰지만, 입이 깔깔해서 면발은 남겨두고 국물만 조금 먹었다. 버스를 타고 수능 고사장으로 향했다. 교문 앞은 이미 많은 수험생과 부모님들로 가득했다. 상기된 얼굴, 알수 없는 표정, 몇몇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들, 다들 나랑 같은 또래의 친구들일 텐데 나보다 한참은 어려 보였다. 시험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정신도 또렷했다. (아! 이번 시험 왠지 망한 것 같다. 시험이 너무 쉽다 생각이 들면 항상 망쳤던 기억이다)


그렇게 오전 시험이 끝나고 다가온 점심시간, 보온 도시락을 꺼내거나 잠시 자리를 비우는 학생들. 나도 챙겨 온 초코바와 우유로 허기를 채웠다. 오후 시험은 어떻게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서야 교실에서 나왔던 기억이다. 교문 밖은 오전에 봤던 부모님들이 여전히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당히 춥고 힘들었을 텐데 긴 시간 동안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렸을까?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나는 수능 고사장을 빠져나왔다.


놀라우리만큼 생각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상태였다. 고등학교 수업을 제대로 받았던 건 1학년 1년이 전부였기 때문에 입시학원을 1년 다녔다 하더라고 그 시간을 다 채우진 못 한 것 같다.  

목포역에 도착하고서야 집에 전화를 안 한 게 생각났다. 갑자기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여기서 그냥 집에 가는 버스를 타면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갈 수 있는데, 잠시 망설이다 전화했다. 소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 목소리. "저예요, 막내. 엄마는요"   "일 갔제"  "네, 저녁 챙겨 드세요, 또 전화드릴게요" 

나는 수원행 기차를 탔다.


나의 수능은 그렇게 시작됐고, 도둑 공부는 몇 년 동안 진행형이 되었다.

그 해 새벽 기차를 타고 목포에 가서 수능을 봤던 건 아직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오늘부로 그 비밀은 나를 떠났다)




그때 내가 수능을 포기했었다면 나의 꿈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수능 점수가 높고, 꼭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함이 아니라 나는 그 과정을 오롯이 나를 위해 투자했던 그 시간을 소중히 생각한다. 세상을 살면서 오롯이 나를 위해 맹목적으로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시기가 또 있을까. 



오늘 수능은 본 친구들에게 박수를... 정말 너무너무 잘 견뎌왔다고 크게 칭찬해 주고 싶다.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글 쓰는 친구들#수능#목포#소녀의 꿈#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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