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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맫차 Oct 08. 2020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789쪽의 하루키 월드

꽤 길었던 지난 추석 연휴,

목표는 단순했다.


다른 것들은 다 대충 해내더라도 잡념들을 비워내고

하루키의 789쪽짜리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는 것.


영상에다, 그 안에서도 숏 폼 형태의 콘텐츠만 소비하다 보니

두꺼운 하드커버의

789쪽짜리 소설을 읽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 읽어내고 말았다.


이전까진

상실의 시대를 서너 번 읽고,

노르웨이의 숲 커버와 번역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호감을 가질 자신이 있었다면,


이제 789쪽을 무사히 읽어낸 사람에겐

왠지 모를 긴- 유대감을 느끼게 될 것 같단 생각이다.



p. 118

그림자는 고개를 저었다. "논리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어. 논리를 말하기 전에, 이곳의 공기는 내게 맞지 않아. 여기 공기는 다른 곳의 공기와 다르다고. 내게나 너에게나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 공기야. 너는 나를 버려서는 안 되는 거였어. 우리, 지금까지 둘이서 함께 잘 지내 왔잖아. 그런데 왜 나를 버린 거야?"

어차피, 이미 늦었다. 그림자는 이미 내 몸에서 뜯겨 나갔다.

"자리를 잡으면 너를 데리러 올게."하고 나는 말했다. "일시적으로 헤어져 있는 거야.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아.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어."

그림자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는, 초점 없는 멀건 눈으로 힘없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3시의 태양이 우리 둘을 비추고 있었다. 내게는 그림자가 없고, 그림자에게는 본체가 없었다.


p. 203

옷을 매력적으로 벗는 여자는 많아도, 매력적으로 입는 여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녀가 옷을 다 입고 손등으로 끌어올리듯 긴 머리의 매무새를 단정히 하자, 방 안 공기가 새로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p. 250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맥주를 마셨다. 괜한 충고다. 나는 맥주를 마음껏 마시기 위해 수영장에 다니고 러닝을 하면서 뱃살을 빼고 있다.


p. 279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은데, 나는 너무도 지쳐 있었다. 그런 무력감 속에서, 의식이 조금씩 멀어지는 걸 느꼈다. 마치 상승하려는 의식을 육체가 겨우 붙들고 있는 듯한 기묘한 분열이 나를 덮쳤다. 그 어느 쪽에 몸을 맡기면 좋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p. 341

"먼 훗날이 되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그때 가서는 이미 늦은 경우도 있지.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행동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어서, 그래서 다들 혼란스러운 거야."


p. 389

"모두 잘될 거라고 믿으면, 세상에 두려운 것은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믿는 일이 적어져."하고 나는 말했다. "이가 닳는 것처럼 말이야. 딱히 시니컬해지는 것도 아니고, 회의적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닳을 뿐이지."


p. 636

결국 내가 생각한 것은 여자와 둘이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술을 마시는 일뿐이었다. 그 외에는 하고 싶은 일이 별로 없었다.


p. 688

"가령 그게 뭐가 되었든,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분명한 마음의 작용이야. 알겠어? 당신이 뭔가를 믿는다고 쳐. 그 믿음 때문에 어쩌면 배신당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실망이 찾아오지. 그런 게 바로 마음의 움직임이야. 당신은 마음이란 게 있는 거야?"


p. 736

"날이 밝기 전의 어두운 시간을 좋아해요, 나." 그녀가 말했다. "청결하고 쓸모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시간은 금방 끝나 버리지. 날이 밝고 신문 배달원과 우유 배달원이 다녀가고, 전철도 달리고."


p. 741

"9시에 나가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어디 공원에 가서 둘이 햇볕 쬐면서 맥주를 마시는 거야. 그리고 10시 반이 되면 당신을 어딘가에 데려다주고, 나는 그다음에 갈게. 당신은 뭐 할 건데?"

"집에 와서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리고 혼자서 당신과 했던 섹스를 생각할 거예요. 나쁘지 않죠?"

"나쁘지 않네."하고 나는 말했다. 나쁘지 않다.


p. 774

공정함이란 아주 한정된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 개념은 모든 위상에 영향을 미친다. 달팽이에서 철물점 카운터와 결혼 생활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아도, 그게 아니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정함은 애정과 유사하다. 내가 상대에게 주려는 것이 상대가 내게 원하는 것과 일치하진 않는다. 그러니 많은 것들이 내 앞을, 또는 내 안을 그냥 지나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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