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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Feb 10. 2016

#8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어쩔 수 없음의 표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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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과 함께 고요한 실스마리아를 깊은 구름이 감싸는 순간일 것이다. 극 중에서 실스마리아는 ‘말로야 스네이크’의 각본을 쓴 공간이며, 중년의 여배우 마리아 엔더스 (줄리엣 비노쉬)와 그녀의 비서인 발렌틴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대본 연습을 하는 공간이다. 동시에 이곳에서 ‘말로야 스네이크’의 작가인 빌렘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발렌틴은 마리아에게서 떠난다. 때때로 영화 속에서 대자연의 광활한 풍광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주는 감동에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말로야 언덕에서 바라본 광활한 풍경과 함께 우아한 파헬벨의 음악이 펼쳐질 때, 그 장관이 주는 힘에는 자연다큐멘터리적 이미지를 초월하는 특별함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 있다.


헬레나와 발렌틴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는 마리아.


영화의 초반부, 빌렘의 대리수상을 위해 시상식으로 향하던 마리아는 빌렘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다음으로 갑작스러운 자연풍경의 인서트와 함께, 눈 덮인 설원에서 한 남자의 육체를 옮기는 구급대원의 모습이 볼 수 있다. 후에 우리는 마리아와 빌렘의 부인과의 통화를 통해 그것이 자살한 빌렘이며, 그 자연풍경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실스마리아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눈 덮인 적막한 설원. 그곳에서 벌어진 한 노인의 자살. 빌렘은 왜 하필 그곳에서 죽음을 택해야 했었을까? 이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마주한 실스마리아의 이미지이다.


실스마리아에서 발렌틴과 대본 연습을 하는 마리아는 중년 여성인 헬레나 역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며 발렌틴과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하게 된다. 마리아가 배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과정에는 젊음이 지닌 충동성을 가볍게 여기면서도, 이젠 그런 충동성을 껴안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충돌이 느껴진다. 조앤 (클레이 모레츠)이 출연한 SF 영화를 본 뒤 나누는 대화에서, 마리아는 진정성과 캐릭터의 철학에 대한 발렌틴에 의견을 우습게 여기며 비꼴 뿐이다. 하지만 그 뒤 도박에 충동적으로 배팅하고 술에 취한 채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 정신 나간 듯이 웃고 떠드는 모습에는 젊음을 뒤쫓으려는 안감힘이 느껴진다. 젊음의 행동을 가볍고 우습게 여기는 동시에 그런 행동이 가지는 충동성을 쫓는 마리아의 모습은 마치 헬레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시그리드처럼 느껴진다.


마리아와 발렌틴의 대본 연습은 현실과 연극 사이를 교묘하게 오간다. 현실의 대화처럼 쫓아가던 대화가 연극의 대본으로 이어지고, 연극의 대본 중간중간에 실제로 두 인물이 나눴을 법한 현실의 대화가 끼어져 있다. 이는 동시에 현실에서 마리아와 발렌틴의 관계와 연극에서의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관계를 겹쳐보도록 한다. 헬레나와 시그리드는 사장과 비서의 관계이면서 중년의 헬레나가 젊고 매혹적인 시그리드에게 끌리는 에로스적 관계이다. 마리아와 발렌틴이 호수에서 수영을 하는 장면 속에 비춰진 두 여성의 나체는 분명 둘 사이의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가 남자친구 만나러 가는 발렌틴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그리고 다음날 아침 침대에 누워있는 발렌틴을 확인할 때. 그 시선은 은밀하며 동시에 질투로 가득하다. 물론 마리아-발렌틴과 헬레나-시그리드 두 관계를 정확히 등치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에는 사장인 헬레나가 사라졌지만, 영화에서 사라진 인물은 비서인 발렌틴이다. 중요한 것은 젊은 시절에서 연극에서 매혹적인 시그리드의 역할을 했던 마리아가 20년이 지난 후 마리아와 시그리드 그 중간의 어느 곳에 혹은 그 두 명의 동시에 불안정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며, 20년 전 헬레나가 사라졌듯 발렌틴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한 아름다움, 말로야 스네이크.


이 글의 처음에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말로야 스네이크’ 즉 실스마리아를 휘감는 구름의 광경에 대해서 말했었다. 영화 속에서 말로야 스네이크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순간은 100년 전에 촬영되었다는 다큐멘터리 속 영상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빌렘은 그 영상을 보고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각본을 쓰게 되었다. 빌렘이 생을 마감한 말로야 언덕 역시 ‘말로야 스네이크’와 깊게 관련 있다. 이후 그곳은 두 번 더 보이는데 한 번은 마리아와 빌렘의 미망인이 빌렘을 추억하며 말로야 스네이크 얘기를 해주기 위해 찾아가고, 다른 한 번은 마리아와 발렌틴이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기 위해 오른다. 그곳이 말로야 스네이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라면 자살하던 날 빌렘 역시 말로야 스네이크를 기대하며 그곳에 올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죽기 전에 원하던 것을 보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영화에서 말로야 스네이크 자연현상은 총 두 번 발생한다. 첫 번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순간으로 발렌틴이 초저녁에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자동차를 몰고 나설 때이다. 낯선 전자음과 함께 깊게 잠식한 안개 그리고 뒤엉킨 이미지들 사이로 발렌틴은 성급하게 차에서 내려 구토를 한다. 우리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다음 장면에서 발렌틴과 실스마리아를 뒤덮고 있는 말로야 스네이크를 확인할 수 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짙은 안개로 가득한 실스마리아에서 발렌틴은 말로야 스네이크에 갇혔을 뿐 스네이크를 보지 못한다.


두 번째는 이 글의 처음에 얘기했던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우아한 말로야 스네이크의 장면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를 볼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발렌틴은 마리아와 함께 산길을 오르지만, 자꾸만 의미 없이 반복되는 마리아와의 말다툼에 지쳐간다. 마리아가 언덕의 끝에 올랐을 때 뒤에서 따라오던 발렌틴은 사라지고 없다. 말로야 스네이크가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읊조리던 마리아는 뒤늦게 발렌틴이 사라져버린 것을 알고 서둘러 언덕을 내려와 찾아 헤맨다. 마리아가 발렌틴을 찾던 그 순간, 말로야 스네이크는 비로소 실스마리아를 휘감는다. 이 순간 역시 마리아는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지 못한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빚어낸 말로야 스네이크. 정작 영화 속 인물 모두 그것을 실제로 보지 못한 채 놓쳐 버린다. 그 풍광을 볼 수 있었던 건 오직 영화를 본 우리들 뿐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완성되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그 장면이 영화 속 등장인물 보는 것은 실패했다는 사실은 어딘지 가볍게 여기지지 않는다.


마리아, 어쩔 수 없음의 표정. 


마리아는 더 이상 시그리드가 될 수 없는 자신의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부딪친다. 그녀가 시그리드가 될 수 없는 것은 많은 이유를 동원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조앤처럼 젊지않고 그 세대의 문화를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또한 젊은 조앤처럼 충동적이지도 매혹적이지도 않다. 시그리드와 헬레나는 서로의 공통점 때문에 서로에게 끌렸으며, 시그리드의 20년 후가 헬레나라는 클라우스의 해석을 그대로 믿는다면, 시그리드였던 마리아가 헬레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시그리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어쩐지 슬프게 다가온다. 이 모든 결과를 젊음의 유무라는 명확한 이분법적 구조로 나눈다면,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편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단순화는 끊임없이 내면적 갈등을 겪고 있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녀가 더 이상 시그리드로 남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그리드로서 마리아의 순간은 이미 지나쳐 버렸다. 시그리드의 연기에 대한 마리아의 조언과 그것에 대한 조앤의 대답은 마리아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다시 마리아가 보지 못한 말로야 스네이크로 돌아가 보자. 마리아가 더 이상 시그리드가 될 수 없다는 한계. 가장 아름다운 것을 경험할 수 없다는 은유. 물론 마리아가 시그리드로 남지 못한 것과 말로야 스네이크 현상을 보지 못한 것에는 어떠한 인과적 상관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영원히 머물러 있고 싶은 하지만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하는 그 순간과 이유도 시간도 알지 못한채 기다려야 하는 하지만 보지 못한채 사라져버린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마리아를 둘러쌓은 채 서로 공명한다. 마리아는 시그리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봤던 그 아름다움을 그녀가 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변화는 그저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인간의 한계라고 말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난 그 황홀한 풍경 앞에 인간의 어쩔 수 없음이 보였다. 영화의 엔딩. 무대 위 의자에 앉은 채 허공을 응시하는 마리아. 그녀의 표정에 담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한 인간의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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