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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Jan 31. 2016

#7 영화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

빈약한 복수심과 불편한 고통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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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서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휴 글래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복수를 위해 부상을 안고 필사적으로 피츠제럴드 (톰  하디)를 쫓는다. 이 한 줄로만 봤을 때 서사를 진행시키는 원리는 글래스의 불타는 복수심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향한 아버지의 복수심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등을 기댄 채 쉬고 있을 때 벽에 남기는 피츠제럴드의 이름을 통해서만 글래스의 목표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에서 그 보다 선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글래스가 느끼는 고통이다. 저 죽지 않는 인물. 그리고  또다시 반복하게 될 고통. 우리는 글래스가 살아남고자 하는 이유에는 마음이 쓰이지 않고, 그가 느끼는 고통의 순간만을 쫓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다. 대신 그 고통의 스펙터클을  볼뿐이다.

 

물론 이 영화를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나 역시 영화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영화 속에서 보인 몇몇 이미지의 잔혹함 때문일 것이다. 그 순간에는 매번 대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선 화면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신체를 훼손하는 게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여기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신체의 훼손이 아니라 그것에 가까이 다가간 화면이다. 글래스의 복수심에는 어쩐지 마음이 쓰이지 않고, 몇몇 화면이 나를 인상 찌푸리게 했던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동일한 형식적 선택의 결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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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폭력 이미지는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다. 이에 대한 하나의 견해는 폭력의 이미지를  보고자 하는 관객의 욕망이 폭력의 재현을 실현한다고 얘기한다. 영화의 초반부 원주민들의 습격 장면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면 그 말이 맞아 보이기도 한다. 총과 화살이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죽음의 현장에서 정신을 잃은 듯한 카메라는 분명하게 살상의 순간을 쫓고 있다. 마치 모든 죽음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혹은 모든 죽음이 카메라에 담겨야 된다는 듯이 카메라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는 한 명씩 목숨을 잃는다. 수평방향으로 쫓던 카메라  불현듯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바라볼 때 나무 위에서 활을 쏘던 원주민을 총을 맞고 떨어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카메라의 움직임을 설명하기에 그것은 분명 지나쳐 보인다. 영화 속 카메라에 담긴 이미지는 폭력의 이미지를 향한 탐닉을 초과한다. 그리고 거기엔 카메라의 탐닉이 있다.


‘레버넌트’의 ‘이냐리투’ 감독은 바로 전에 ‘버드맨’을 만들었다. 두 영화 모두 극단적인 롱테이크와 현란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각인되어 있는 영화이다. '레버넌트'의 촬영감독인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전작인 '버드맨'은 물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를 촬영했다.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자유로운 그리고 우주복의 안과 밖을 통과하며 산드라 블록의 육체를 탐닉하듯 떠다니던 카메라의 움직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레버넌트'의 카메라 역시 명백히 뛰어난 기술력과 오랜 고민의 결과이며, 이는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움직임을 통해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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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넌트’ 속에서 카메라는 인물과 사건에 다가섰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방향을 쫓아 신속히 회전한다. 이때 사건을 다가선 카메라가 인식시키는 것은 현장감이 아닌 카메라라는 명백한 위치이다. 죽은 아들의 옆에서 거친 호흡에 의해 렌즈에 서리는 습기. 거칠 몸짓으로 계곡을 건너면서 렌즈에 맺히는 물방울. 서로의 몸을 칼로 처참하게 찔렀을 때 렌즈에 튀는 피의 자국. 영화에서 보이는 이미지를 카메라가 찍고 있다는 사실을 매 순간 명백히 보여준다. 


카메라 앞에 놓인 재현을 리얼하게 담아내겠다는 야심은 이렇게 화면에 얼룩을 만들어 낸다. 영화가 아무리 대자연의 찬 공기와 반복되는 죽음의 고통 안에서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안전하고 편안한 영화관의 의자에 앉아 있다. 물론 이건 이  영화뿐 만이 아니라 모든 영화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굳이 그 거리를 확인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명확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무언가가 찍히고 있음을 입증하는 동시에 스크린에 비치는 것과 영화관에 앉아 있는 나 사이를 나누고 있는 카메라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시킨다. 나는 이것이 카메라의 탐닉이 초래한 비극이라고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그 비극의 결과가 복수심의 상실과 불편하게 만드는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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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리투 감독은 영화를 찍으며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같은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했다. 아마도 그건 리얼리티와 현장감이라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며, 자연광을 활용한 촬영 그리고 실제로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화면은 아마도 그러한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해 방법론적 결단일 것이다. 영화에 담긴 광활한 자연 풍광들을 보며 그러한 야심이 실현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기엔 동시에 서사에 개입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카메라의 움직임과 롱테이크는 관객이 영화의 재현 속에 직접 위치한 듯한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본 우리는 이냐리투가 실현하려 했던 리얼리즘의 야심을 느낄 수 없다. 아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남자가 살인자를 쫓을 때 아버지의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래도 불편하다. 카메라의 놀라운 움직임이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을 진 몰라도 그 선택에 동의할 순 없다. 설마 그가 얘기했던 자연 다큐멘터리가 이런 식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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