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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Feb 14. 2016

#9 영화 <경성학교 : 사라진 소녀들>

우리는 이 영화를 편히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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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개봉한 '경성학교'는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아니 거의 비난 속에 여름 극장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미스터리 공포물을 기대하고 찾았던 관객에게 갑작스러운 박보영의 공중 도약과 문짝을  집어던지는 괴력은 얼큰한 김치찌개에 실수로 빠뜨린 핫소스처럼 불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물론 미스터리 호러라는 하나의 장르물로서 그 흠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스터리의 긴장감을 너무나 쉽게 놓치는 전개도 아쉬웠고, 공포감을 자아내는 이미지 역시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럼에도 난 이 영화를 보면서 공포감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으며, 그것은 나에게 영화를 초월하는 무엇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글로 정리해본다.


물에 빠졌던 소녀들은 어떻게 됐을까.


주란 (박보영) 과 연덕 (박소담) 은 산너머에 있다는 바다를 보러 가자며 지하실을 거쳐 학교의 밖으로 나간다. 그 둘이 산을 통과하다 마주한 것은 넓지 않은 호수이다. 연덕은 호숫가에 정박되어 있는 배에 앉아 있고, 즐거운 마음에 주란이 달려가 안기자 둘은 물에 빠지게 된다. 둘이 호수에 빠지자마자 다음 씬으로 넘어가서 주란은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기숙사에 누워  또다시 링거를 맞고 있다. 이 이후로 주란의 몸은 급속도로 좋아지며 놀라운 신체능력을 가지게 된다. 영화에서 주란의 신체적 변화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이 장면은 아무래도 그 전환이 너무나 급작스럽다. 후에 주란의 회상 속에서 호수를 빠져나온 둘이 호숫가에 누워있는 장면이 다시 한 번 등장한다. 하지만 호수가 처음 등장하는 그 순간에서는 두 소녀가 물에 빠지자마자 끝나버린다. 혹은 다른 말로 물에 빠지는 것은 보여주지만 물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얘기하려 한다.)


영화에서 호수라는 공간은 또 다른 방식으로 한 번 더 보인다. 주란의 신체능력이 갑작스럽게 향상된 주란에게서 사라진 시즈코의 기억을 떠올린 연덕은 정신 나간 듯 지하실로 달려가 지난 기억을 떠올린다.  그다음 장면에서 주란은 호숫가의 배에 홀로 앉아있다가 누군가의 손에 끌려 물에 빠지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물속에서 마치 죽은 채 서있는 듯한 소녀들의 이미지를 본다. 주란이 보이는 특별한 능력과 후에 밝혀지는  물속에서 죽어있는 소녀들을 고려해 봤을 때 이 장면에서 주란은 미래를 예지한 것일까? 하지만 동시에 주란이 본 것은 동시에 죽어있는 자기 자신이다. 그것이 무엇이었건 주란은 환영의 방식으로 호수에서의 죽음을 본다. 



소녀들을 둘러싼 물과 유리의 이미지들.


영화 속에서 물의 이미지는 다양한 형태로 의미를 가지며 보인다. 앞서 말했듯, 주란과 연덕이 학교에서 빠져나와 찾아간 곳은 호수이며, 산 너머에 있다고 믿는 것은 바다이다. 주란은 병이 낫기 위해 링거를 맞고 있으며, 링거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은 매번 선명히 비친다. 주란은 환상 속에서 호수 안에 죽어있는 소녀들을 보고, 죽은 소녀의 흔적을 바닥에 남겨진 액체로 느끼며, 사라진 소녀들은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유리병 속에 선채로 갇혀있다. 그녀들의 소망은 산 넘어의 바다와 병을 낫기 위한 링거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는 일본군의 훈련기지와 신체 실험을 위한 투약의 형태로 밝혀지면서, 그들의 순수한 소망은 무너진다. 그리고 호수 안의 죽음. 죽은 소녀가 남긴 액체. 유리병 속 죽어있는 소녀. 물은 동시에 죽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물과 더불어 깨진 유리의 이미지 역시 형태를 바꾸며 반복한다. 주란의 맞고 있는 링거액은 왜 그렇게 반복적으로 떨어지며 깨지는가. 동경 유학을 평가하기 위한 상담기회가 주란에게 주어지자, 분노한 유카 (공예지) 가 주란을 밀어붙이고, 이때 주란의 초자연적 능력은 찬장의 유리를 깨트린다.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시킨다는 이상한 기체를 마시다 깨어난 주란이 뒤척였을 때 유리로 된 호흡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깨진다. 일본군이 총을 들고 주란을 위협할 때 주란은 깨진 유리조각을 던져 일본군을 제압한다. 그리고 주란은 그 깨진 유리 조작에 기꺼이 몸이 베이며, 새빨간 피를 보인다.


물과 유리. 이 두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과 닿아 있다. 연덕이 주란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지만 켄지 (심희섭) 에게 맞고 쓰러진다. 깨어난 연덕은 유리병 속에서 선채로 손과 발이 수갑이 묶여 있고, 위에서는 물이 쏟아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병 속에 차오르는 물은 연덕의 숨을 죄여 오고 뒤늦게 주란이 연덕을 찼았을 때 우리는  물속에서 죽어간 연덕을 본다. 그녀는 산채로 물에 빠져 죽어버린 것이다. 그 끔찍함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주란에게서도 보았다. 동경 유학을 위한 상담의 공간은 어쩐지 괴이하다. 어두운 방 안에 주란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동그란 빛이 있다. 그것이 불빛인지 아니면 어두운 방 안에 있는 유일한 유리창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보통 배에 많이 있는 조그만 원형 창문과 유사하게 생겼다. 그리고 주란은 거기서 손과 발이 묶인 채 앉아 있어야 한다. 주란에게 직접적으로 목숨을 잃을 위험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연덕과 주란이 겪은 개별적인 상황은 죽음의 불안감을 부인할 수 없다. 



소녀들은 빠져나오지 못한다.


글의 초반부에서 얘기했던 주란과 연덕이 호수에 빠진 이후 갑작스럽게 중단된 장면에 대해서 마저 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중단의 장면 구성은 보통 상상씬을 삽입할 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것이 실제로 환상인지 아닌지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서사에서 물에 빠진 이후가 주란 혹은 연덕의 환상이라는 설명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 장면을 기점으로 심화되는 미스터리와 주란이 가지게 되는 비현실적 신체능력은 이 장면에 나타난 갑작스러운 이야기의 중단을 의심스럽게 한다. 물에 빠진 두 소녀는 어떻게 됐을까? (물론 후에 의식을 잃은 주란에 의해 물에서 빠져나온 둘이 물가에 누워있는 이미지는 보이지만, 그것은 주란의 회상 혹은 상상일 뿐 갑작스러운 장면의 중단을 경험한 우리의 당혹감을 해명하지는 못한다.)


이 갑작스러운 중단은 영화를 보면서도 나의 감각을 자꾸만 주란과 연덕이 물에 빠져있는 그 시간으로 되돌아 가게 한다. 그리고 마치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나아가지 못하고 비현실성으로만 뻣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나에겐 이 영화는 물에 빠져있는 두 소녀의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를 공포스럽게 했던 부분은 바로 이 시점에서 출발한다. 두 소녀는 물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혹은 두 소녀가 물 밖으로 빠져나오는 이미지는 보이지 않았는데도 영화 속 서사는 그냥 별 상관없이 진행된다. 따라서 나에게는 두 소녀가 물 밖으로 안전하게 나왔음을 확인하는 것이 그 이후 진행되는 영화에서 피할 수 없는 물음이었으며,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기대하는 마음은 내가 느끼는 공포의 기원이었다.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이 확인되지 않은 채로 영화는 끝나버린다.


영화의 엔딩. 지하실에서 주란과 연덕은 고장 난 축음기를 작동시키려 한다. LP판은 돌아가기 시작하지만 축음기가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다. 축음기에서 나오게 될 아름다운 음악을 기다리는 두 소녀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노래가 나오며 영화는 끝난다. 이때 들리는 음악은 이야기 안에 존재하는 음악인가 아니면  이야기 밖에 존재하는 음악인가. 다른 말로 그녀들이 듣는 음악을 우리가 듣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듣는 음악을 그녀들은 듣지 못하는 것인가. 영화의 초반부, 주란의 일기장을 찾아주기 위해 주란과 연덕이 처음으로 함께 지하실을 찾았을 때, 화면에서는 축음기가 클로즈업되고 이에 연덕은 여기 있는 것은 모두 고장 나 있다고 대답한다. 주란의 아무런 물음 없이도 연덕이 대답하는 것을 보면 축음기를 응시하는 주란의 시선을 연덕이 감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은 정확히 그 시선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축음기가 고쳐졌는지 고쳐지지 않았는지는 혹은 그녀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 역시 확인되지 않은 채 끝나버린다.  



우리들은 빠져나올 수 없(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짧은 첨언을 더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물속에 갇힌 채 죽어간 소녀. 물에 빠진 채 나오지 못한 소녀. 그 이미지들 앞에서 내가 느낀 공포감 혹은 불편함이 영화를 초월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단순하게 말하겠다. 영화를 보면서 반복적으로 내게 떠올랐던 것은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였다. 나는 그것이 이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의 의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확인했던 감독의 어떠한 인터뷰에서도 그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는 일이다. 영화를 본 우리는 이미 2014년 4월 16일을 경유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영화 속 소녀들의 이미지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어야 한)다. 영화를 본 뒤 쓰인 지저분한 나의 글이 2014년 4월 16일에 대한 해석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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