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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Nov 28. 2016

#15 <키리시마...> 정확한 실패의 위로

정확한 실패의 아름다움에 대한 단상

왜 어떤 패배의 이야기는 위로가 되고, 어떤 승리의 이야기는 공허하기만 할까? 더 구체적으로 왜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을 그만둔대'(이하, '키리시마') 속 영화부 감독 '마에다'의 패배는 위로를 주고, '족구왕' 속 '만섭'의 승리는 공허할까? 어쩌면 그건 정확성의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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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시마'는 그 제목과는 역설적으로 한 번도 극중에서 키리시마라는 인물이 또렷하게 등장하지 않은 채로 영화가 진행한다. 그 부재한 자리에서 벌어지는 몇 일간의 시간을 서로 다른 위치에서 반복한다. 이를 통해 같은 곳에 있지만 함께 하지 않았던 인물들을 보여준다. 반복은 결국 인물 개개인을 제대로 보기 위한 방법인 동시에, 개별적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생길 수밖에 없는 거리감을 불러일으킨다. 유독 카메라가 누군가의 시선을 대신하는 순간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시선은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주관으로 보기 위한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확인되는 그들 사이의 거리감은 오인의 문제라기 보단 애초에 자신을 가지기에는 너무 약하고 어렸던 인물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키리시마라는 고정점의 상실은 그들 사이의 관계를 유지시키던 안정감을 흐트려 놓는다.


기악부 부장 '아야'와 영화감독 '마에다'는 그런 상황에서 키리시마의 부재와는 상관없이 작동하는 인물이다. 물론 그들 역시 시선의 문제를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작동시키려 한다. 기악부 부장 아야는 짝사랑하는 히로키가 자신을 바라보길 바란다. 그녀는 그의 뒷자리에 앉아 항상 그를 바라보지만, 그는 그녀를 향해 뒤돌아보지 않는다. (히로키가 창밖을 바라보고, 아야가 그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 둘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그려진 장면 중 하나이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악기를 연주한다. 음악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은 그에게 닿지 않는다. 


영화부의 마에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들이민다. 겨우 영화를 찍으려해도 시끄러운 소리와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들의 촬영을 방해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보고 싶은 마에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8미리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의 카메라는 이야기에 닿지 않는다. 악기연주와 카메라가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 순간 자신이 가진 능력의 최대치를 시도한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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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6분 간의 마법 같은 장면의 매력은 이들이 충돌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키리시마인지 명확하지 않은 한 남자가 옥상에 나타나고, 그를 찾기위해 가까이 있지만 함께하지 못한 인물들이 옥상이라는 하나의 공간으로 뛰어간다. 그리고 시선의 한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기악부 부장 아야의 합주와 마에다의 카메라가 함께한다. 하나의 공간을 향하는 서로 다른 인물. 아야와 마에다가 만들어내는 가능성의 최대치. 동시에 일어나는 세 개의 사건은 서로 인과관계로 엮여 있지 않으며,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한다. 아야의 음악은 옥상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며, 거친 8mm 필름의 화면은 마에다만이 바라보는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이 순간 나뉘어져있던 인물들이 한 곳으로 힘차게 뛰어가고, 아야의 음악과 마에다의 카메라가 그것을 감싼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가 된다. 마치 영화가 서로 떨어져 있던 인물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았다는 느낌이 든다.


한 차례 소동이 일단락되고 함께 뛰던 모든 이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야와 마에다는 최고의 순간을 각각 듣고 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돌아온 히로키는 마에다가 그 순간을 보았음을 그리고 자신은 그 순간을 보지 못했음을 본다. 옥상에서 내려와 히로키는 키리시마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야구 연습을 하고 있는 운동장을 바라본다. 드래프트가 끝날 때까지는 야구를 계속 하겠다던 선배도 아직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야구 연습하는 외침은 점점 커지고, 동시에 통화음은 점점 줄어든다. 화면은 일순간 하얗게 바뀌며 영화는 끝난다. 이때 하얀 화면 안에서 들리는 함성 소리는 힘찬 열정의 외침이다. 그 백색의 화면이 만들어내는 빈자리는 마치 거울처럼 나를 보게 한다. 그 순간 나는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히로키의 자리에 서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어디서 힘찬 함성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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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족구왕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와 처음의 질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려 한다. 족구대회에서 승리한 뒤 갑자기 공간은 아름답고 낯선 해안도로로 전환된다. 수 천 km/h를 향해 올라가는 속도와 자동차가 지나간 자리의 저 반짝거림은 그 이미지를 어떤 상상 혹은 환상처럼 느끼게 한다. 거기엔 외제차를 타고 있는 만섭이 있다. '쓸모없는' 족구에 열광할 줄 아는 만섭이 승리 후 외제차를 타게 된다는 도식은 누구의 욕망이 실현될 걸까?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 실현이다. 어떠한 설명 없이도 외제차를 타고 있다는 그 이미지 자체가 성공으로 혹은 어떠한 보상으로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모든 개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그들 각각의 성공이라는 목적지를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치환되었다. 가장 중요할 개인적인 자리에 공공의 목적지가 대신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의 목적지를 상실한 우리는 공허해진다.  


<족구왕>


'키리시마'의 마에다는 적어도 그 낡고 뿌연 8mm 카메라로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환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비록 그의 이야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자신의 말처럼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정확히 안다. 그것은 같은 공간에서 있으면서도 다른 이는 누구도 보지 못한 이미지이며, 서로 공유할 수 없는 환상이고, 자기 자신만이 원하던 꿈이다. 재치발랄한 복학생 만섭의 유쾌한 반란에도 이 영화의 엔딩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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