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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Feb 11. 2017

#16 <재심> 우연이라는 선택

투명한 서사과 불투명한 인물에 대해서.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재심'은 대체로 투명하다. 서사적으로 투명하며 동시에 투명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서사적으로 의심이 없으며,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는 의미에 그렀다. 이것은 비교적 최근에 종결된 사건을 영화화하면서 발생한 필연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허나 과거 시점의 사건을 보여줄 때 그 투명성은 지나칠 정도이다. 영화는 사건이 벌어졌던 2000년의 시간과 재심을 청구하는 현재의 시간, 두 가지 시간 속 에서 진행된다. 이 때 과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영화가 선택한 방식은 벌어진 사건을 그대로 영화를 통해 재현하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우리는 곧바로 오토바이를 타는 현우(강하늘)가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순간을 그대로 본다. 그 사건의 전후가 현우의 입을 통해서 진술되는 순간 역시 동일한 방식을 취한다. 현우가 왜 그 때 오토바이를 타고 약촌오거리를 지나갔어야 했는지, 억울하게 살인자 누명을 쓴 현우가 왜 거짓진술과 거짓편지를 써야 했는지, 영화는 그저 그 순간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당시의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는 것은 단지 현우의 기억 뿐 만이 아니다. 영화에서 대사로도 나오듯이 재심의 요건은 현우가 범인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이며, 그 증거는 실제 사건에 나왔던 증인의 증언이다.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는 당연하게도 준영(정우)이 증인을 찾는 과정에 있다. (이 순간 증인들은 ‘찾는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준영 앞에 기능적으로 나타난다. 증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 앞에 선다.) 그리고 증인들의 진술과 기억은 언제나 플래시백으로 이어진다. 사건 3년 뒤 재수사를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졌던 형사의 답답함도, 다방에서 일하던 수정(김연서)에 대한 애뜻함도, 모두 영화 속 재현에 그려져 있다.

현재 시점과 플래시백의 반복으로만 이어지는 이 영화에서는 사건에 대한 일말의 의심과 불안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실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겠다‘는 이 영화의 태도에는 확신에 찬 억울함과 분노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진실에 대한 확신을 가진 영화가 가지게 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일 것이다.


2.

이처럼 투명한 이 영화에서 오직 주인공인 준영(정우)과 현우(강하늘)만이 불투명한 위치에 있다는 점은 특별하다.


변호사 준영(정우)은 부동산 관련 재판 장면으로 처음 등장한다. 거기서 그는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 한 방으로 유명해지고 돈을 벌려고 하는, 탐욕적인 변호사로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그에 대한 진실일까. 준영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판사의 대사일 뿐, 그것이 준영을 규정할 수는 없다. 다만 명백한 사실은 그 역시 이 부동산 사건의 피해자 중 일부이며, 그가 자신의 재산을 탕진해 재판을 진행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그는 도의적이고 따뜻한 변호사의 위치에 서는 듯하다. 해안가에서 현우와 나란히 앉아 있는 롱 쇼트와 친구의 스카웃 제안을 거부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러한 변화를 읽어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만일 판사의 말이 실제 그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현우의 재심에 몰입하는 영화 속 준영은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애초에 그가 쫓았던 것은 지방대 출신의 특별하지 못한 변호사가 언론에 조명을 받을 수 있는 사건 한 방으로 유명한 변호사가 되는 길이었고, 그가 현우의 재심에 성공한 다면 언론의 조명을 이룰 수 있다. 이 영화를 돈만 쫓는 비도덕적인 변호사가 사건을 통해 변화하여 죄 없고 불쌍한 피해자를 구원한다는 영웅 서사로만 읽기에는 그 행위가 명확하지 않다. 준영이 칼을 휘두르려는 현우를 붙잡고 뱉어냈던 말은 어쩌면 그의 진심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현우(강하늘)은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인물이었을까. 역시 그 말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누명이 해소될 수 없을 거라는 절망에 지친 현우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경찰들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경찰과의 몸싸움 과정 중에 2층에서 떨어지고,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떨어진 현우의 곁에 하필 칼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는 단호하게 칼을 집어 들어 명백히 형사를 찌르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 이 순간 형사는 어떠한 방어도 할 수 없다. 현우는 명백히 형사를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때마침 준영이 도착해 현우를 밀쳤기 때문에 현우의 살인은 실패한다. 준영은 현우에게 ‘너는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좀 전에 본 것은 사람을 죽이려는 현우였다. 만일 준영의 설득이 영화 속에서 진실로 받아들여지려면, 현우는 칼을 휘두르기 전에 자의로 내려놓아야 한다. 때문에 현우가 정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영화 장면만으로는 알 수 없다.


3.

이 영화의 선택은 여기에 있다. 투명한 영화 속 불투명한 준영과 현우. 그 순간 준영이 얼마나 정의로운 인물인지, 현우가 얼마나 선한 인물인지는 중요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정의로운‘ 변호사였다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변호하는 ’본인의 업무를 수행한‘ 변호사였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지극히 현실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만일 두 인물이 특수하게 정의롭고 선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 사건이 해결될 수 있었다면, 현실에 놓인 수많은 유사한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 이 영화는 그러한 현실에 반대한다는 교훈을 설파한다. 다만 자신의 업무를 정직하게 수행하는 인물을 통해, 살인하지 않은 사람이 살인했다는 누명을 씌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 의도나 감정에 상관없이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일어난 행위만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영화의 선택이다.


영화의 후반부. ‘약촌오거리’라는 명백한 인서트와 함께 모텔로 이동한다. 앞서 추락한 현우의 곁에 하필 칼이 놓여 있었다고 얘기했다. 하필 놓여있는 칼. 살인사건을 지나가단 현우의 오토바이에 하필 들어 있었던 칼. 명백히 이것은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반복이다. 비록 2000년의 현실에서는 ‘하필’이라는 우연적 사건이 그를 처벌했지만, 2017년의 영화에서는 ‘하필’이라는 우연적 사건으로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하필 이라는 우연적 사건과 상관없이 실제 일어난 행위만을 보자는 것. ‘재심’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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