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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Nov 27. 2016

#14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뉴욕의 어떤 기억들

영화는 현실의 아픔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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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재현의 장르이다. 이것은 영화 속 서사가 실화를 배경으로 했는지 혹은 지어낸 이야기인지와 무관하다. 설사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라 할지라도 카메라라는 기계로 배우들의 움직임을 찍어야 하는 영화라는 장르는 필연적으로 현실의 모방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때문에 영화는 언제나 세상의 사건 혹은 현실의 고통에 매우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아무리 현실의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대형 스크린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압도하는 영화가 되는 순간 그것은 감당할 수 있는 것 혹은 오락거리가 된다. 때문에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그렇다면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이 재현하는 것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허드슨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비행기 추락사고를 재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허드슨강의 기적'이 일어난 순간부터 판결이 끝날 때 까지를 다룬다. 하지만 영화에 비치는 것은 '허드슨강의 기적'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 시기 뉴욕 시민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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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설리가 모는 비행기의 추락 장면으로 시작한다. 뉴욕 도심에 추락하는 이미지와 함께 설리가 몸서리치며 깨어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설리의 꿈임을 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서도 순간의 정확한 판단을 통해 기적적으로 승객 전원을 살려낸 설리에게 조차 사고의 순간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기억이다. 그를 영웅적으로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도 그에게 사고의 순간을 다시 떠올리게 할 뿐이다. 사고의 순간에 함께 했던 부기장과 잠들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고, 멍하니 바라본 창문에서 비행기 사고의 이미지를 본다.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일 뿐, 그는 죽을 뻔했다는 그리고 죽일 뻔했다는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티비쇼에 출연하며 농담을 하곤 있지만 당신도 155명 중 하나였다는 아내의 눈물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실체에 더 가깝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설리만의 트라우마는 아닐 것이다. 영화 속에서 사고 당일의 모습은 점진적으로 여러 번 보인다. 설리는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가까이에 있는 다른 비행장을 향해 저고도로 비행기를 몬다. 고층건물로 향하는 비행기. 불현듯 뉴욕 시민들의 시선. 그 순간 그들에게 떠오르는 것은 911의 미국이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에 항공기 테러 사건이 발생했고, 이 과정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미국인들이 911 이후 테러의 공포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허드슨강의 기적으로 영웅이 된 설리에게 시민들은 911과 금융위기로 절망에 빠진 뉴욕 시민들에게 희망을 줬다고 얘기한다. 비행기 추락을 바라보며 느꼈을 시민들의 공포는 명백하다.


사고가 설리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는 의심은 해결되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불안과 공포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감독은 공포에 떨고 있는 시민들에게 개개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한 미국이라는 시스템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설파한다. 다소 과잉처럼 느껴지는 엔딩크레딧에서 실제 인물들의 삽입은 그러한 의도에 정확히 부합한다. 이 영화의 감독이 누구인가. 미국의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다운 외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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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나는 내가 있는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을 깨닫고 아득해진다. 천조국의 위대한 승리의 외침을  보면서도 감동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사는 곳이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굳이 긴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2년 전 세월호를 겪었고 거기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폐와 우리 스스로의 나약함을 확인했다. 많은 이들이 이제는 끝난 일이라는 생각을 할 무렵 사건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음에 드러났고 뉴스는 연일 새로운 소식을 실어 나른다.


911의 미국이 겪었던 트라우마를 이제 416의 대한민국이 겪고 있을 것이다. 물론 두 고통을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기타노 다케시는 2011년 대지진에 대해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 번 일어난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911이든 416이든 재난 이후에 살아가야 하는 국민은 이유 없는 불안감에서 피할 수 없다. 여전히 우리는 재난 앞에서 지휘의 목소리를 신뢰할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아야 하는 한 국민으로서 이 불안이 언제쯤 해소될 수 있을지 고통스럽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영화에서 이 불안이 어떻게 다뤄지게 될지 나는 궁금하다. 어쨌든 우리는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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