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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Apr 09. 2017

#23 <로맨스 조> 그녀의 이야기에 만족하셨나요.

이야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여기 마법 같은 이야기가 가득하다.


달리는 말(馬)의 사진이 담긴 액자. 우스운 배경음악과 함께 카메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액자가 걸린 여관의 허름한 복도를 비춘다. '로맨스 조'에는 달리는 말(馬)과 같은 말(言)의 범람이 있고, 액자 속 그림은 액자로 퍼져 나간다. 당신이 이 영화를 본다면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맞추는 퍼즐게임을 하게 된다. '로맨스 조'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300만 감독’(이한철)은 PD에 끌려 시골의 여관에 들어왔다가 ‘다방 레지’(신동미)를 만나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성인 로맨스 조’(김영필)는 자살을 하려고 여관을 찾았다가 ‘다방 레지’(신동미)를 만난다. ‘어린 로맨스 조’(이다윗)는 사랑하는 초희(이채은)를 따라 어두운 밤 서울로 향한다. 그리고 ‘시골 소년’(의현)은 집을 나간 엄마를 찾기 위해 편지의 주소에 적힌 다방에 갔다가 ‘다방 레지’(신동미)를 만난다.

4개의 이야기는 서로에게 간섭하며 각자의 시작과 끝을 공유한다. 이를테면 ‘다방 레지’가 ‘300만 감독’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자살을 하려고 여관을 찾은 ‘로맨스 조’의 이야기이고, ‘시골 소년’의 이야기는 로맨스 조의 친구인 ‘담’(김동현)이 들려주는 시나리오의 얘기에서 시작하더니, 다방 레지가 자살을 하러 온 로맨스 조와 만나는 것으로 이어진다. 시골 소년이 들려주는 엄마의 이야기에는 초희와 어린 로맨스 조와의 사랑이 담겨있고, 여기에 성인 로맨스 조의 회상과 다방 레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결합하는 형식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는 전해들은 경험담이기도 하며, 가상의 시나리오가 됐다가, 지나간 추억으로 변모한다. 사실로서의 경험과 허구로서의 시나리오를 오가는 이야기는 사실성과는 무관하게 하나로 묶인다. 결국은 다방 레지가 만들어낸 이야기 이기에 사실성을 따지는 것은 의미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중에도 우리는 한 인물의 시나리오와 다른 인물의 추억을 아무런 이물감 없이 하나의 서사적 흐름으로 연결시킨다. 다방 레지라는 고정점을 통해 드디어 이야기가 하나로 묶이며 혼란이 잠재워지자, 비로소 범람하던 이야기가 서사적으로 납득이 되며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성공한다. 이야기의 혼란이 해소됐다는 만족감. 이야기를 듣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용의 사실성이 아닌 서사적 합리성이다. 


손목에 흔적이 남겨져있다.


하지만 영화는 다방 레지를 통해 이야기가 완결된 지점에 끝나지 않고 조금 더 밀고 나간다. 거기서 로맨스 조는 옛 마을을 찾아가 시골 소년과 경찰을 만난다. 이 지점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다시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시작에는 소문 때문에 자살한 배우 우주연의 죽음이 있었다. 그런데 코미디로 흘러가는 진행방식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야기는 어딘지 가볍지 않다. '어떤 이야기도 못 만들겠어'라며 좌절에 빠진 로맨스 조는 자살을 하기 위해 여관을 찾는다. 초희 역시 고요한 숲에서 나무에 기대 손목을 그었다. 다방 레지 역시 손목에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손목의 상처를 통해 자살의 시도라는 경험을 공유한다. 그 범람하는 말속에서 발견되는 죽음의 결은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


말이 밀려오는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낯선 그들은 이내 이야기의 충동에 빠진다. ‘이야기를 해주세요.’,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라는 말은 마치 주문처럼 그들 사이에서 반복된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는 물론 타인의 이야기를 하길 즐기며, 쉽게 만들어낸다. 300만 감독은 자신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다. 어린 로맨스 조와 성인 로맨스 조 역시 악의 없이 자신의 추억을 얘기한다. 다방 레지는 이젠 머리를 써야 하는 시대라며 이야기를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안다. 거기서 유독 초희만이 이야기하기를 거부한다. 초희는 자신을 둘러싼 말들을 두려워하며, 고요한 숲에서 나무에 기대 손목을 그었다. 손목을 그은 그녀의 행동은 어딘지 영화의 초반부 자살한 배우를 떠올리게 한다. 두 여성 모두 자신을 둘러싼 소문, 이야기를 피해 자살을 시도하였으며, 한 사람은 성공했지만 한 사람은 실패했다. 말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어쩌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다방 레지는 초희의 반대편에 서있는 인물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야기는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며, 이것이 그저 이야기임을 안다. 이야기로 남자를 유혹한 뒤 '긴밤'을 보낸 그녀는 다방으로 돌아와서는 손님에게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며 동료에게 충고한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도 자살한 여배우도 모두 그녀 주변에 흐르고 있고 그녀는 그것들이 이야기가 되는 순간 자신이 생존할 수 있음을 안다. 때문에 그녀는 결코 이야기에 잠식되지 않는다. 살아가는 것이 그녀에게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초희와 다방 레지 모두 이야기의 곁에서 쓸쓸하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이다. 남산이 보이는 어두운 뒷골목이 그녀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두 명의 감독이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시골 모텔에 내려온 로맨스 조는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자살하려고 한다. 초희와 다방 레지처럼 손목을 그었지만 장난 같은 손목의 상처를 흔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우습다. 영화의 후반부에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면서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지만 스스로가 이야기에 갇혀 있음을 알지 못한다. 반면 PD에게 이끌려 시골 여관으로 내려온 300만 감독은 다방 레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유혹돼 하룻밤을 지새운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어딘지 스릴러적인 요소가 있다고 외치는 그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이야기만을 쫓을 뿐이다. 그들은 이야기 속에서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


유혹하는 토끼를 보며 선택해야 한다.


액자의 가장 바깥에 있던 다방 레지가 이야기를 통해 생존하고, 액자의 가장 중심에 있는 초희는 이야기를 밀쳐내며 생존하는 반면, 액자 그 자체인 로맨스 조와 액자 밖 관객인 300만 감독은 이야기 속에 갇힌 채 이야기를 유희한다. 초희의 삶과 로맨스 조의 삶 사이의 거리는 동시에 다방 레지가 만들어 낸 말랑말랑한 로맨스와 300만 감독이 발견한 스릴러적 요소 사이의 간극일 것이다. 다층적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서사적 구성으로 이끌고 왔던 영화에서 두 간극은 하나의 질문이 된다.

여기 끝나버린 한 소년소녀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경로는 모두 제각기이다. 하지만 남산타워가 보이는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초희와 다방 레지뿐이다. 아마도 300만 감독과 로맨스 조는 여관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그곳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끝내야 할 시간이라는 것도 모른 채 토끼를 쫓다가 길을 잃어버린 저 멍청한 앨리스들은 여전히 자신이 어딨는지 조차 모른다. 이야기를 이해했다고 만족하고 있는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여관에 머물 것인가, 남산타워 밑 어둠 속으로 걸을 것인가. 영화는 이야기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잔인하게 현실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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