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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Apr 16. 2017

#24 <무용> 옷 속에 담긴 삶의 흔적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인물에 다가갈 수 있을까.

내게 있어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핵심은 주관적인 판단이다. 현실은 가까이 놓인 카메라의 출현으로 왜곡될 수 있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 나는 현실 속의 고유한 드라마를 포착하기를 원한다.
- 지아장커 -


어떻게 인물에 다가설 것인가.

다큐멘터리가 진실을 보여준다는 것은 위험한 오해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비록 실제 벌어진 일을 찍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상이 되어 관객에게 보여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선택된 일부만이 편집될 수 밖에 없다. 완성본이 보여질 때는 만든자의 선택과 의도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카메라 앞에 놓이는 대상은 거기에 카메라가 있다는걸 지각하는 순간 실제와 동일한 모습을 보이기 어렵다. 낯선 카메라가 나를 찍는다면 나는 자연스레 내가 보여지고 싶은 모습을 흉내내며 위장하게 될 것이다. 카메라가 다가가는 순간 거기에 필연적으로 거짓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면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인물에 다가갈 수 있을까.



상품으로서 옷. 용도가 없는 옷.

지아장커의 2007년 작품인 다큐멘터리 '무용'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의류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옷은 전세계에 싼 값을 팔리며 공장의 노동자는 기계의 부품처럼 같은 일을 반복한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옷의 브랜드인 'exception'을 따라 영화는 2부로 이어지며 디자이너 '마커'의 작업실로 자리를 옮긴다. 마커가 새로 런칭하는 브랜드'무용(無用)'은 파리의 패션쇼에서 서구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화려하게 소개된다. 마커의 차를 따라 도착한 3부에서는 산샤의 노동자들의 모습이 있다.


1부의 공장과 2부의 디자이너 사이의 연결은 공장에서 만들어져 고유의 가치가 사라진 의류산업에 대한 비판이며, 하나의 대안으로 브랜드'무용'을 바라보고 있다. 1부에서는 단 한번의 인터뷰도 없이 그저 일하는 노동자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특정 장면에서 개별 노동자의 움직임이 담기기는 하나, 무리지어 동일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을 긍정하기는 쉽지 않다. 디자이너 마커의 인터뷰와 함께 시작하는 2부의 태도는 이와 대조적이다. 마커의 유일무이한 옷은 더 이상 제품으로밖에 가치를 지니지 않는 공장의 옷과도 다르며, 루이비통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사치품과도 가치를 달리한다. 마커는 옷을 통해 제품으로의 가치를 초월하는 자연을 담은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려고 한다.


삶의 실재가 담긴 옷

허나 지아장커가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가 바라본 옷의 진정한 가치는 3부에 있는 듯 하다. 마커의 차를 따라 이동하던 카메라는 불현듯 왜소한 노동자의 육체로 시선을 옮긴다. 저렴한 돈으로 옷을 수선하는 노동자. 직접 만든 옷으로는 값싼 공장의 옷과 경쟁할 수 없어 탄광에서 일을 하게 된 재단사. 검은 탄이 뭍은 그들의 육체와 흙먼지가 날리는 그들의 옷이 대변하는 인민의 삶. 마당에 널린 채 마치 살아 움직이듯 바람에 흩날리는 허름한 옷은, '공장에서 동일하게 찍혀나오는 옷'도 '디자이너가 만든 패션쇼의 옷'도 담아낼 수 없는 옷의 가치가 담겨있다. 1부에서 노동자의 제품이 개별적 가치를 잃은 공산품일 뿐이라면 2부에서 마커가 만든 옷은 사용가치를 잃은(무용한) 예술품일 뿐이다. 중국의 예술가가 만든 예술품이 저 멀리 서구의 프랑스 파리에서 옷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채, 정확히 셋팅된 조명과 서구 모델의 부드러운 몸에 입혀져 관객들의 조심스런 시선으로 관찰될 때 그것은 옷으로 대변되는 중국 인민의 삶이 가지는 가치를 말하지 못한다. 


3부의 몇몇 장면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에 놓여있는 듯 하다. 이를테면 옷을 수선한 노동자가 돌아오는 길에 검은 탄을 뭍힌 채 담배를 피는 세 명의 노동자의 모습이 인위적으로 위치해있으며,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옷을 흔든 모습은 아무런 서사적 이유없이 감동을 준다. 여기에는 여타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구구절절한 설명과 비판적 인터뷰도 없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하는 말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대신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의 옷에서 떨어지는 흙에서 마커가 옷을 묻기 위해 신중하게 선택된 흙을, 노동자의 집에 때모르고 달려있는 크리스마스 조명에서 패션쇼의 화려한 조명을 떠올리게 한다. 흙먼지가 날리는 산샤의 풍경과 널려있는 옷가지를 묵묵히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렇게 중국 인민의 '마음'에 다가선다. 


< 지아장커 >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대상에 다가갈 수 있을까. 거기에 어떠한 보편적 답이 존재할 수 없다. 다만 개별적 가능성만은 존재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임신한 재단사는 술독에 빠진 남편을 구박한 뒤 자신이 만든 아기의 옷을 매만진다. 2부에서 마커가 얘기한 '어머니의 손길이 떠도는 아들의 옷'이 그렇게 임신한 재단사의 손길에 깃든다. 불편한 현실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거기에 담겨진 인민의 삶에 대한 응원의 시선은 이 영화를 아름답게 한다. '무용'은 그렇게 인물의 인위를 통해 대상의 안으로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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