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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Apr 22. 2017

#25 <택시 드라이버> 이 도시에 영웅은 없다

무의미한 폭력의 징후는 어떻게 영화에 그려지는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트레비스(로버트 드 니로)는 저녁시간을 버티기 위해 심야의 택시 드라이버가 된다. 이제 막 해병대 복무를 마친 그에게 뉴욕은 섹스, 마약, 호모, 윤락으로 더럽혀진 하수구 같은 공간이다. 영화가 개봉한 1976년은 이제 막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직후이다. 해병대 복무를 한 트레비스 역시 베트남 참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것이며, 영화 속 분위기 역시 이러한 시대의 징후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트레비스가 바라본 쓰레기 같은 뉴욕


'길거리에 나뒹구는 술병', '매춘을 유혹하는 여자들의 옷차림', '시민들을 위협하는 길거리의 흑인'. 늦은 밤 택시에서 본 뉴욕의 풍경은 더러운 쓰레기로 가득하다. 트레비스(로버트 드 니로)에게 이 거리는 오물로 가득하며 언젠가 깨끗하게 씻어버려야 할 대상일 뿐이다. 더러운 세상에서 오직 베티(시빌 셰퍼드)만이 그들과 달리 깨끗한 인간이다. 그녀를 처음 본 트레비스는 쓰레기 같은 뉴욕에서 그녀만이 천사이고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다. 오로지 그와 그녀만이 쓰레기 같은 뉴욕에서 깨끗한 인간이다.


하지만 베티와의 첫 데이트에서 그녀를 포르노 극장에 데려가고, 놀란 그녀는 트레비스에게서 도망친다. 취미로 포르노 영화를 보며 팝콘을 파는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트레비스 역시 뉴욕 쓰레기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정작 그 스스로는 이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베티에게 차인 트레비스는 그녀 역시 뉴욕의 냉혈안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한 손님을 태운다. 미터기를 꺾으라고 강압적으로 말하는 그는 흑인과 바람이 난 자신의 아내를 44 구경 매그넘으로 쏴버릴 거라고 말한다. 자신이 미치광이로 보이냐는 남자의 질문에 진지한 표정으로 창문에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는 트레비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스트레스적으로 넘어가는 택시미터기와 연거푸 약을 입에 털어 넣는 행위는 강박증적으로 트레비스에게서 반복된다. 거울을 바라보며 총을 꺼내 드는 트레비스는 "You talking to me"라고 반복하며 말한다. 여기에는 반복되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강방증이 있다. 영화 속 그의 행동 역시 선의가 아닌 강박증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분노의 대상은 누구인가. 혹은 그의 대사 속 'You'는 누구인가.


불명확한 표적, 대상 없는 분노


조금 앞으로 돌아가 트레비스의 차에 올라탄 두 명의 인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베티가 선거운동을 하는 팔렌타인(레오나르드 해리스)이다. 자신은 뉴욕의 쓰레기들과는 다르다는 망상에 빠진 트레비스는 팔렌타인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뒤이어 어린 창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가 갑자기 타서는 어디로든 출발해달라고 얘기한다. 이내 한 포주로 보이는 한 사내 매튜(하비 케이틀)가 뒷문을 열어 그녀를 끌고 가고, 트레비스에게 20달러짜리 구겨진 지폐를 던진다. 이후 트레비스는 팔렌타인와 아이리스를 번갈아가며 오간다.



팔렌타인을 향한 트레비스의 행동에는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그가 팔렌타인의 연설장을 찾는 장면은 영화에서 총 세 번 보여진다. 어딘지 음흉스러운 시선으로 연설장을 찾은 첫 번째에서 트레비스는 경호원에게 이상한 사람을 봤다고 하고는, 자신도 경호원이 되고 싶다고 한다. 두 번째는 택시에 앉아 얼굴이 가려진 팔렌타인을 멀리서 관찰하다가, 그의 경호원이 된 환상을 본다. 그러다 차를 세워놓으면 안 된다는 말에 허겁지겁 떠난다. 세 번째는 마치 암살하려는 듯 총을 꺼냈다가 경호원이 달려오자 허무하게 도망친다. 부감으로 비춰지는 그의 모습은 우습기 그지없다. 나는 트레비스가 정말로 팔렌타인을 죽이려 했는지 의심이 든다. 혹은 그 의심 자체가 트레비스의 태도처럼 느껴진다.


그는 정말로 팔렌타인을 쏘기 위해 총을 준비한 것일까. 팔렌타인을 암살하려는 행위는 어딘지 갑작스럽다. 그가 팔렌타인에게 분노할 원인은 강박증적으로 다가온 티비 속 그의 얼굴뿐이다. 유세장에서 트레비스가 벌인 행위 역시 조금은 엇나가 있으며 많이 미흡하게 그친다. 팔렌타인을 죽여야 할 동기가 없으며, 경호원이 된 환상은 역설적이고, 도망치는 풍경은 우습다. 오히려 그는 총을 쏴야 할 대상을 모른 채 배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총을 샀지만 쏴야 할 곳을 모르고, 분노가 있지만 대상(원인)을 모른다.



매번 팔렌타인에 뒤이어 등장하는 아이리스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그녀를 구하려는 행위는, 우연히 자신의 차에 올라탄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하수구 같은 세상을 직접 청소하겠다는 결단 때문일까. 동료에게 빌린 5달러를 돌려주는 장면에서, 매튜가 던진 20달러 지폐를 움켜쥐는 그의 모습은 어떠한 의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의지는 바로 전 장면에서 바람난 아내에게 44 구경 매그넘을 갈기겠다는 남자에게서 기인했을 것이다. 자신이 미친것 같냐는 그의 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에 신중하게 창문으로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고, 이후 정확히 그가 말했던 44 구경 매그넘을 구입한다. 트레비스는 아이리스와의 아침식사에 이어 매튜가 아이리스에게 사탕발린 말로 붙잡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영화는 오직 트레비스의 시점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트레비스의 시선과 무관하게 삽입된 이 둘의 장면은 생경하다. 오히려 틸트업으로 건물을 훑으며 시작하는 쇼트와 남자의 갑작스러운 다정함은, 이 장면이 팔렌타인 연설장의 경호원 환상과 대응하는 아이리스에 대한 트레비스의 상상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아이리스를 구해야 한다는 그의 다짐은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결정되고, 자신이 만든 상상에 의해 증폭된다.


이 도시에 영웅은 없다


트레비스는 아이리스를 구하기 위해 총을 발사한다. 아니 이 말은 잘못되었다. 트레비스는 총을 발사하기 위해 아이리스를 구한다. 그의 목표는 총을 발사하는 것이지 그녀를 구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택시를 몰며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한 채 우연히 발견된 아이리스만이 트레비스의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그는 우연히 발견한 대상에 강박증적으로 집착한다.) 만일 아이리스를 매튜에게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녀가 바랬던 대로 그녀와 함께 떠나는 것으로 간편하게 완수될 수 있었지만, 트레비스는 한사코 이를 거부한 뒤 남자들에게 총을 쏜다.(아이리스 주변의 남자들을 향한 총격씬은 과잉으로 가득 차 있다.) 세 명의 남자에게 총을 갈기는 장면은, 때문에 복수의 희열도 구원의 위로도 없는, 오로지 총과 피가 질주하는 폭력의 카타르시스만이 가득하다. 과잉에 가득 찬 이 총격씬의 결과는 부감으로 느리게 움직이는 세 개의 쇼트로 전시된다. 하지만 폭력의 카타르시스는 영웅이라는 역설적인 결말로 향한다. 그는 대중에게 가련한 소녀를 구한 영웅으로 그려지고, 그에게 혐오를 느끼며 도망쳤던 배티는 영웅이 된 그에게 돌아온다.



이 갑작스러운 결말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영웅이 되었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대상을 잃은 총이 발사되었는데, 그것이 우연히 목표물에 맞았을 뿐이다. 그의 목적 없는 행위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고, 원인 없는 행동에 결과가 뒤따랐다. 때문에 이 도시에서 영웅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우연뿐이다. 그 말은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 쓰레기 같은 도시를 구해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곳 뉴욕은 희망 없는 지옥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남자. 그의 강박증적인 행위와 원인 없는 결론. 무의미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지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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