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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Jun 15. 2017

#27 <로건> 로건은 누구와 싸우는가

히어로의 죽음이라는 낯선 풍경

육체의 노화라는 적


영화 '로건' 속 악당은 무력하다. 한 팔에 기계장치를 장착한 피어스는 거만한 말투와는 달리 로라의 등장에 가장 먼저 도망치며 기계팔은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부서진다. 그들을 이끄는 가이스 박사 역시 자신이 창조한 또 하나의 울버린, X-24를 맘대로 조종하지 못하며 별다른 저항 없이 죽음을 맞는다. 유일하게 로건 일행을 방해하는 것은 X-24이다. 울버린의 유전자를 통해 탄생한 X-24는 그 힘과 능력 면에서 로건을 앞선다. 찰스와 농장의 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X-24가 로건과의 첫 만남에서 아무런 폭력 없이 스쳐지나갈 때 둘의 육체는 하나의 화면에 담긴다. 이 순간 둘의 얼굴을 통해 대비되는 것은 정확히 젊음과 늙음이다. 옥수수를 앞두고 얘기되는 유전자변형기술에 관한 농담과는 무관하게 X-24가 가진 우월성의 핵심은 젊음에 있다. 젊은 자기 자신과 부딪쳐서 이기지 못하는 로건. 로건은 지금 육체의 노화와 싸우고 있는 중이다.

슈퍼 히어로 장르는 육체의 문제에 무관심하다. 그것은 단순히 마음을 읽고 하늘을 날라 다니는 초능력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몸과 몸이 부딪치는 액션에서 조차 육체의 고통과 손상을 느낄 수 없다. 캡틴 아메리카의 근육질 몸은 록키의 부서질 듯한 육체와 다르고, 아이언맨의 활주는 건물을 뛰어넘는 성룡의 도약과 무관하다. 대형 자본에 의한 복제와 재생산의 반복을 통해 장르를 유지해 온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그들은 늙지 않을 뿐 아니라 불멸의 존재가 된다. 육체의 문제에 무관심한 슈퍼히어로 장르는 자연스레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스파이더맨은 배우를 바꿔가며 영원한 젊음을 누리고, 히스레저의 죽음 이후에도 조커는 계속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로건의 노화와 죽음을 본다.


영화는 슈퍼히어로 영화중에서는 드물게 미성년자관람불가 등급을 받았을 정도로 잔인한 장면이 많다. 로건이 리무진 부품을 훔치려는 도둑들에게 손에서 칼날을 꺼내 얼굴에 꽂는 것으로 시작하여,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로건과 로라의 칼날에 의해 신체는 조각나고 찢겨진다. 잔혹한 살육 뒤에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로건과 로라의 몸에 새겨진 상처와 피의 흔적이다. 칼날을 감춘 그들의 손가락 사이에는 피의 얼굴이 흥건하고, 얼굴과 옷에는 자신의 피와 적들의 피가 분간하지 못하도록 뒤섞여 얼룩져있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여정의 고단함과 피의 지난함이 그들의 상처에 새겨진다. 다만 금세 말끔해지는 로라의 몸과는 달리 로건의 몸은 새겨진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로건과 로라가 마주하는 얼굴은 상처 난 몸과 상처 나지 않은 몸의 대비인 동시에 늙은 육체와 젊은 육체 사이의 대비이다. 육체의 지속은 노화를 경유하며, 그 결과는 언제나 죽음이다.


이미 도착해 있는 죽음


물론 로건의 죽음은 단순히 영화의 도착점은 아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잠에서 깨는 로건의 얼굴이다. 짙은 어둠 밑에서 잠든 로건은 시끄러운 소리와 진동에 잠에서 깬다. 좀비 같은 발걸음으로 리무진 밖으로 나간 로건은 잘 나오지 않는 손의 칼날을 당황스럽게 바라본다. 그의 행동은 짧은 휴식이 아닌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보인다. 로건이 잠들어 있는 리무진은 로건의 육체에 새겨지는 상처와 함께 총탄에 부서지고 깨진다. 로건의 육체와 공명하는 리무진은 자체의 긴 형상으로 인해 단순한 차량이 아닌 로건이 잠들어 있는 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로라를 처음만나는 공간이 공동묘지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로건은 첫 장면에서부터 이미 죽음에 매우 가까이 있는 인물이다. 겨우 운전석에 버티고 앉아 있는 로건에게 죽고 싶은 거냐고 로라가 물었을 때, 로건은 부인하지 못한다. 아내와 자식을 잃은 농장의 주인이 로건에게 방아쇠를 당기려하자 로건은 이를 받아들이려는 듯 눈을 감는다. 로건이 자기 때문에 죽은 이들에게 어떠한 애도의 행위도 남기지 않는 점을 생각한다면,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그의 행위를 단순히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죽음이 도착해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영화 속에서 로건은 단 한순간도 살기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미 도착해있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이미 도착해 있는 죽음. 때문에 영화는 이미 죽어있는 로건이 다시 한 번 제대로 죽기 위한 과정으로 인식된다. 결국 로건의 행위는 로라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른 아버지의 부정이 아닌,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영원불멸의 육체를 가진 울버린이 죽음을 앞둔 로건이 되었을 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히어로는 한정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가 된다. 로건은 로라의 가방에서 엑스맨 만화책을 발견한다. 엑스맨도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며 만화책을 집어던지는 로건에게 찰스는 로라 역시 삶의 일시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반복과 재생산을 통해 불멸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영화 로건은 이렇게 불현듯 삶의 일시성을 상기시킨다. 로건은 가장 이질적인, 동시에 가장 감동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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