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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Jan 23. 2016

#5 영화 <종이달>

어떤 망설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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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지만 조금은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주부이자 은행직원인 '리카'는 거액의 고객의 돈을 횡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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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런 소재로 이야기를 구성할 경우에 가정 먼저 떠올리는 것은 욕망과 파멸의 연쇄에 관한 비극일 것이다. 돈은 욕망 그 자체이며, 욕망한 개인은 파멸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학습된 교훈이다. 몇 년 전 개봉한 화차는 그러한 돈의 가치속성과 파멸의 연쇄를 비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종이달’은 이것과는 다르게 영화를 진행시킨다. 영화에는 주인공의 행위에 대한 비난의 관점이 희미하다. 주인공의 범죄행위를 밝혀내는 과정은 어떠한 성취감이 건조하게 그려지며, 범죄를 밝혀낸 직원이 정의롭게 보이지도 않는다. 범죄의 피해자들 역시 겨우 범죄 행위를 알게 되었다 뿐이지,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달리는 주인공의 뒤로 펼쳐진 할아버지는 새로 산 카메라를 기분 좋게 매만지고 있다. 범죄가 밝혀졌는데도, 범죄를 밝혀낸 영웅도 없고, 범죄의 피해자도 없다. 그저 범죄를 저지른 '리카'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결론에 이르러 그녀가 파멸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러한 결론에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인간의 욕망과 파멸이라는 교훈에 도달하는 글들을 읽을 때면, 이건 영화를 통해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돈이라는 소재에 대한 반복적 학습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의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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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성스럽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영화는 시작한다. 한 소녀가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책상위에 돈을 센 뒤 봉투에 담는다. 우리는 아직 이 장면을 알지 못하다. 그리고는 리카가 은행을 다니며 고객의 돈에 손을 대고, 대학생'코타'를 만나며 할아버지가 입금하려던 돈을 횡령해 코타에게 전하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영화가 1/3 가량 진행된 후에야 이 노래를 다시 듣게 된다. 그제야 과거 서사를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이 현재서사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 도달해서 노래와 함께 세 번째로 과거로 돌아가서야 비로소 그것이 '리카'의 과거 서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지 그전까지는 그것이 과거라는 것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저 성인'리카'에게 벌어지는 이야기와 학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두 개의 개별 서사가 각자 진행되다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서로 충돌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과거 서사와 현재 서사의 사이에서 서로의 연관성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한 구조는 때때로 과거의 원인을 통해 현재를 해석하려하기도 하며, 과거와 현재 사이의 변화된 개인의 모습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하여튼 우리는 그 둘 사이를 번갈아 본다.

과거 서사는 비교적 간결하게 요약된다. 제 3국가의 어린이들을 돕게 된 학생'리카'는 더 많은 돈을 기부하기 위해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는 범죄를 저지른다. 리카는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행위가 어떻게 잘못일 수 있냐며 당당히 말한다. 그리고 이 범죄에 대해 얘기하면서 도움 받은 어린이의 편지가 리카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가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서사는 범죄는 몇 가지 절차를 가지며 진행된다. 처음으로 고객의 돈에 손을 대는 장면에서, 리카는 화장품을 사려다가 현금이 모자라 고객의 돈을 쓴 뒤 다시 채워 넣는다. 그리고 그 사건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비춰진다. 그 다음에 지하철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대학생에게 먼저 다가간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희미한 달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달은 그녀에게 허상뿐인 달이다. 이 두 번의 사건은 결국 그녀가 충동적으로 어떤 욕망을 표출하지만, 그로 인해 어떠한 처벌이나 반작용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경험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고객의 돈에 손을 대기 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리카는 남편에게 너무 비싸지 않은 시계를 선물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젠 자신에게 조금은 투자해도 된다라는 대답이다. 아마도 이러한 계기들로 그녀의 욕망은 조금씩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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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서사와 현재 서사 모두 돈과 연관되어 있는 범죄를 보여주며, 이의 원인과 과정을 살펴본다. 과거 서사와 현재 서사의 마주침을 바라보며, 메인 포스터의 질문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대답과 함께 그녀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을 분석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들을 분석할수록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망설이게 되었다. 과거 서사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선의를 실천하기 위해 아버지의 돈에 손을 댄 것 같지만, 왜 그녀는 자신이 도와준 어린이에게서 온 감사편지에 집착할까? 현재 서사에서 그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처럼 보이지만, 왜 그녀는 자꾸 대학생 코타 앞에서 거짓된 모습이며 자신의 공간은 갈수록 더러워지고 공허해져만 갈까?

그녀의 행동의 원인을 분석하려고 하면서 생겨났던 망설임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어쩌면 일련의 선택적으로 나열된 이미지만을 통하여 이미 벌어졌던 범죄를 이해하려는 행위는 나에게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영화를 만든 감독 '요시다 다이하치'가 영화를 통해 그녀가 만들어낸 범죄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행동을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는 없겠으나, 다만 마지막 장면을 통해 과거 서사와 현재 서사를 교대로 배치시켜야 했던 결단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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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의 횡령사실은 결국 그녀의 상사에 의해서 밝혀진다. 상사와 둘이 남아 있는 회의실. 리카는 창문을 깨고 뛰어내린 뒤 무작정 달린다. 하지만 이 장면은 분명히 어색하게 찍혀져 있다. 그녀는 2층에서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지만, 추락의 이미지는 정확하게 생략되어 있다. 그것은 상해를 확신할 수 있는 높이는 아니지만, 그 뒤에 달려가는 그녀의 이미지를 바로 연결한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추락의 이미지가 위치해야하는 자리에 달려가는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의 교차편집으로 끝난 듯하다. 하지만 뒤에 에필로그처럼 하나의 씬이 이질적인 화면이 이어진다. 동남아의 작은 시장처럼 보이는 곳에 리카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흰 옷은 피로 물들어 있다. 아마도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일 것이다. 피로 물든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과 몽환적인 화면. 어쩌면 이것이 떨어져서 다친 그녀가 보고 있는 환상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달리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장면이 있다. 리카가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면이 그것이다. 자연스럽게 횡단보도를 건너던 그녀가 사태가 점점 악화되면서 질문에 맞닥뜨린다. 멈출 것인가? 계속 달려갈 것인가? 그녀의 자전거는 갈수록 속도를 빨리하며 달려왔고 너무 멀리와 버린 순간에서야 횡단보도 앞에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결정했는지 보여주지 않고 생략된 채 씬이 바뀌면서 직장 상사와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이야기를 다소 우회하려 한다.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다루는 시간은 1994년과 1995년뿐이다. 이때는 80년대 중반부터 이어지던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진 후의 시점이다. 끝도 없을 것 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경제가 무너졌다. 자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더니 꿈처럼 사라져버렸다. 마치 흔적 없이 사라진 그날 아침의 달처럼. 그 몰락의 시대에서 영화는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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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앞으로 돌아가 상사와 둘이 남아 있는 회의실. 창문을 깨고 떨어지려고 하는 리카. 여기서 추락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녀를 단죄하는 것이다. 또는 뛰어가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녀가 계속 달려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황 앞에서 망설일 때 영화는 추락의 이미지를 생략한 다음, 추락한 뒤 그녀의 환상을 배치시켜 이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하였다. 혹은 결정 앞에서 망설이며 선택하지 못했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 이제는 다 큰 성인이 된, 자신이 도와줬던 소년을 만난다. 소년을 바로 알아본 그녀에 비해, 남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둘은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된 소년에게 고맙다는 말도 들을 수 없고, 도와줬던 것이 자신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 순간 경찰이 다가오자 그녀는 군중 속으로 자신을 감춘다.

영화는 결정 앞에서 망설였으며, 리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을 감췄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권력이자 종교이며 욕망의 대상인 돈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그 자리에서 나 역시 망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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