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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die Jan 13. 2021

영화친구와 나

요즘의 나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사실 여태 살아오면서 이렇게 긴 시간을 놀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긴 쉼이 참 어색하다. 드디어 시간은 많아졌는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아무것도 못하고 방구석에만 처박혀있다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정말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미치지 않기 위해 밖을 나선다.


앞서 내 이야기를 읽은 분이라면 내게 대충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실 거라 생각한다. 나는 지난겨울 크리스마스 즈음 프러포즈를 받았고, 결혼을 준비하다가 돌연 결혼식 한 달 전에 엎었다. 결혼을 하려고 가면을 쓰고 세상에 이런 사람 다시없다 느낄 정도로 잘했던 예비신랑은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고, 예식장 계약을 마치자마자 본래의 성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니 그전부터 스멀스멀 나타나던 것들을 내가 너무 대수롭잖게 여기다가 큰일 날 뻔했다. 그렇게 파혼을 하고, 별을 떠나보냈다. 유산기가 너무 심했던 탓에 결혼 전 프러포즈를 받자마자 하던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몸이 유난히 버텨내지 못했다. 별을 지키기 위해 퇴사를 결정했고, 일을 그만뒀었다. 하지만 석 달만에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별을 잃었고, 파혼을 했으므로. 정신적인 충격과 건강상의 문제로 일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일을 다시 시작했다.


결혼을 하기 위해 고양시에 있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부모님 댁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일을 하려거든 여기서 출퇴근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부모님은 딸내미 정신건강과 몸 건강을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확고한 생각을 하고 계셨고, 바깥 외출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그사이 다리 인대도 끊어먹은 탓에 제대로 걷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미치지 않으면 숨 쉴 수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을 꼼짝도 안 하고 매일 울기만 했다. 더 이상은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다고 생각했을 때쯔음, 원래 다니던 회사의 지점이 근처에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대표님 잘 지내시죠? 수원에 지점이 생기던데. 혹시 직원은 구하셨나요? 구인구직 사이트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아서 여쭤봐요. 혹시 괜찮으시면 지원이 가능할까 해서요.


지점이 생긴다는 것을 친구랑 놀러를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고, 친구는 네가 좋아하던 일이니까 다시 해보는 게 어떻겠냐.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오지 않으면, 대표님께 직접 연락을 드려보고 다시 네가 일을 했으면 좋겠다. 네가 좋아했고, 다시 일을 하고 싶다고 했으니 지금이 적기인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민을 해보다가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라면 나도 일을 하던 곳에서 일을 하는 게 적응하기 수월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쁘게 그만둔 것도 아니고, 나름 일하는 내내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표님께 연락을 드렸지만 짧은 인사 이후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얘기가 끝난 줄 알았다.


한 달쯤 뒤에 대표님이 아닌 부장님 한테 연락이 왔다. 대표님께 내 연락처를 물어 연락을 했다고 했다. 오늘 바로 얼굴 보고 얘기할 수 있냐는 말에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다 바로 준비해 수원으로 갔다. 집에서 수원역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거리였고, 술냄새를 나지 않게 하기 위해 긴 호흡을 하며 떨리는 마음을 뱉어냈다.


수원역에 지점은 이미 오픈해있었다. 대표님이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안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연락이 온 것이라 조금 놀랍긴 했지만, 바쁘셨겠구나 생각하고 부장님을 만나러 들어갔다. 부장님은 밝은 얼굴로 오랜만이라 인사를 건넸다. 부장님은 내 지난 이야기를 짧게 물어보셨고, 나는 대충 큰 사건만 이야기하고 우리의 면접은 끝이 났다. 바로 출근은 어렵고 5월 말즘부터 출근이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부장님은 조금이라도 빨리 와주시면 안 되냐고 했고, 나는 그건 어려워 하루 시간이 남는 날 먼저 출근해 도와주기로 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그건 예전에 선임이었던 대리님 하시던 것처럼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알겠다고 했다.


정식 출근을 하기 전 하루 출근을 했다. 출근을 해서 인사를 했지만, 직원들은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부장님과 이사님이 오셔서 직원들에게 소개를 했다. 나를 본사에서 보낸 매니저라고. 그제야 직원들은 인사를 했고, 원래 매니저를 하기로 하고 입사한 직원은 아래위로 훑어볼 뿐이었다. 아마도 그 친구에게는 내가 자기 자리를 뺐으러 온 사람일 뿐이었겠지. 미움을 사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직급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나는 불편한 것들이 싫어 자리를 다시 한번 마다했고, 부장님은 그 친구가 근무를 하면서 해왔던 행동을 짚으면서 저 친구는 이미 매니저 자리에서 박탈당하기에 충분하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불편했지만, 근무태도로 봤을 때는 문제가 심각했기에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정식 출근도 하기 전이고, 바뀐 레시피도 몰랐다. 같은 브랜드 매장이지만, 내가 근무했던 고양 스타필드 내에 있던 매장은 독립적인 운영을 해왔기 때문에 많이 달랐다.


레시피부터 음료 제조를 하는 기계, 포스기계 까지 어느 하나 같은 것은 없었다. 당연히 인수인계도 없었다. 회사가 참 이상한 게, 내가 처음 입사했던 고양점에서는 대리님이 하나부터 열까지 인수인계를 자세히 해주셨는데 다른 매장은 아무도 인수인계를 안 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같은 매장에서까지 사람마다 레시피도 다 달랐다. 적응도 안된 상태에 인수인계도 없었으니 당연히 버퍼링이 생겼고, 나는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니 그 친구는 소리를 빼액 지르더라.(매니저를 하기로 했던.) 황당해서 이 친구와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우선 내가 몰라서 화가 난 걸 테니 사과했다. (사실 사과할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미안해서 사과했고 그날은 무난히 넘어갔다. 그렇지만 그 친구랑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정식 출근을 하는 날이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친구랑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죽어도 싫었다. 예의가 없는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았다. 이 나이 먹고 자리싸움한다고 어린애랑 다투는 것도 하기 싫었다.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고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부모님은 몸도 성치 않은데 왜 굳이 일을 하려고 하냐고 말리셨다. 부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정식 출근이 아닌 날 출근 하루 한 뒤로 정식 출근까지 약 열흘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병원을 다니며 하던 치료를 마 저해 야했고, 일이 있어 조금 바쁜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이 병원에서,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중간중간 그 친구의 알 수 없는 행동들이 이어졌다. 매니저로 며칠 일을 했다고 한 그 친구는, 내게 소리를 빼액 지르던 그 친구는 사실상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사님께 교육을 받았다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정식 출근도 하기 전부터 문자로 따지듯이 이것저것 물었다. 이거 레시피 알려달라 저거 어떻게 처리하냐 하는 다 기본적인 업무 사항이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건 내가 자리에 없는 동안 내게 자리를 빼앗겼다는 말과 함께 여기저기에 말도 안 되는 험담을 하고 다닌 것 같았다. 화가 나서 근무도 하기 전인데 이렇게 예의 없이 구는 게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더니, 내게 이름을 말하며 정민 씨가 잘못 알았나 본데. 내가 매니저고 수원점 매니저로 정민 씨가 온 게 아니라고 본사에서 얘기하더라는 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말을 왜 내게 하는지도 모르겠고, 당연히 정식 출근도 하기 전이었으니 본사에선 알리 없었다. (그 회사는 이상하게도 부장과 이사가 먼저 상의 없이 일을 진행하고 나중에 본사에서 아는 방식이었다. )


어쨌든 정식으로 출근도 안 했는데 너무 일찍부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고, 일을 하기가 싫어졌다. 내가 원해서 매니저를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고, 내가 그 사람에게 그런 무례한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 친구는 자기가 잘하고 있는데, 내가 이간질을 해서 그 자리를 빼았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본인이 매일 지각하고 레시피 하나 외우지도 못하고, 모든 손님에게 불친절하고 이런 태도로 근무를 하고도 본인의 역할을 최대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 회사로 말할 것 같으면, 매장 오픈전에 제빵사들이 빵을 매장에서 굽기 위해 두어 시간 먼저 출근하고, 매장 오픈 30-60분 전에 홀직원이 출근하는 형식의 카페형 빵집이었다. 직원들이 출근하면서부터 대표는 어플로 시시티브이를 본다. 물론 이사도. 부장도. 본인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마 지금까지도 모르겠지. 뭐 어쨌든.


정식 출근 하루 전 부장님께 죄송하다 근무는 없던 일로 했으면 좋겠다고 연락드렸고, 부장님은 얼굴 보고 얘기하자며 바로 수원으로 갈 테니 수원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2017년도에 입사했고 2019년 12월까지 길다면 길게, 짧다면 짧게 일했던 정든 회사였기 때문에 얼굴 보고 말씀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 나도 매장으로 갔다. 부장님은 그 친구의 계약을 종료할 것이고, 그 친구는 신경 쓸 것 없다고 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그 친구가 그 사이 내게 보낸 문자들을 그대로 보여드렸더니 기겁을 하시고 삼자대면을 하기 위해 그 친구를 불렀다. 예의 없는 행동에 대해 꼬집으시고, 그만두고 싶으면 이 자리에서 그만두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일을 계속하고 싶으면 내게 사과하고 앞으로 똑바로 배우라고 하셨다. 그 친구는 뭐가 그렇게 억울했는지, 씩씩 거리더니 앞치마를 던지고 사직서를 쓰고 나갔다. 그렇게 나는 버라이어티 하게 재입사를 했다.


나는 성격이 지랄 맞아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야 한다. 그 덕분에 어느 회사에 가서도 일에서 만큼은 인정받았다. 매출도 올리고 단골도 만들고, 통수는 여러 번 맞았지만. 어쨌든 일에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 성과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미친 사람처럼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런 탓에, 매장에 대한 적응은 빠르게 하고 새로운 직원을 얼른 뽑아 스케줄에 맞게 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이었던 매출은 급상 하기 시작했고, 운영방식을 고양점에서 배운 그대로 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위생적이기 위해 열심히 했다. 직원들은 곧잘 따라와 줬고, 매출은 점점 나무랄 데 없이 올라갔다. 최고를 찍는 하남점과 만년 2등인 고양점, 새로 생긴 동탄점, 영등포점 등등 11개 정도의 매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중 탑 3안에 들었다.


운영 방식을 고양점 방식으로 바꾸고, 내방식대로 진행했다. 매출은 물론이거니와 팀워크도 점점 좋아졌다. 팀워크가 좋으면 당연히 매출은 더 오른다.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은 언제고 바뀌지 않는다. 팀을 운영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부분은 내방식으로 운영했던 것 같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직원들이 웃게  하기 위해 엔간히 애를 썼다. 직원들의 얼굴이 어두운 것만큼 매출이 떨어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만난 친구가 있다. 네 살이나 어린 친구지만, 어떨 땐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가장 바쁘고 정신없던 시기에 내가 직접 면접을 보고 팀원으로 뽑은 그 친구는 면접 때보다 근무할 때가 훨씬 밝았고, 에너지가 엄청난 친구였다. 나는 웃는 얼굴을 보고 그냥 그 친구가 마음에 들었고, 그 친구 전에 면접 본 친구들이 있었지만 이 친구를 선택했다. 사실 면접을 보기 전에 통화했을 때, 결혼식이 있어 면접을 미룰 수 있냐는 말에 조금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갑자기 면접을 잡은 거라 시간을 조정했고, 조금 바쁜 시간에 면접을 봐야 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하나하나 질문과 답이 오갔다. 뭔가 근데 그 이전의 친구들 면접 본 게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뭔가 이 친구랑 같이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긴장해 움츠러든 어깨로 내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있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뭔가 뭐에 끌렸는지 당장 출근할 수 있냐고 물었고, 그 친구는 보건증만 준비하면 바로 출근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보건증을 가져올 시간을 주고, 다음날 바로 출근하라고 했다. 그 친구는 알겠다고 하고 면접은 끝이 났다.


사실 면접 때 막 와 굉장히 뭔가 어떤 부분이 꽂힌 건 없었다. 그냥 뭔가 성격이 좋을 것 같고, 뭔가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는데, 같이 일하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웃는 얼굴이라 나는 면접 때마다 면접을 보러 온 친구들에게 웃어보라고 했는데,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굉장히 어색한 그 주문이 면접의 터닝포인트였던 것이다.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운 사람은 많이 웃어본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많이 웃어본 사람이 덜 예민하다는 생각도 물론 하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이렇게 인연이 된 이 친구는 출근하면서부터 굉장히 빠르게 습득했고, 직원들조차 모르는 것들도 이미 다 알고 있고,  오히려 직원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는 모습을 보고 정말 감탄했다. (사람 보는 안목 아직 죽지 않았어~하고 속으로 쾌좨를 불렀다.) 알고 보니 롯데몰에서 일을 많이 해본 아이라 여기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고, 덕분에 나도 많은 것을 배웠다. (고양점은 신세계여서 운영방식과 포스가 매우 달랐기 때문에 롯데몰에 쉽게 적응을 못함.) 


이 친구에게 정말 고마웠던 건, 사람이 색안경을 끼고 있지 않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본인이 나서서 이런저런 일들을 알려주고 도와주고, 또 다른 사람에게 많이 배우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너무 예뻤다. 그리고 여태 겪어 보지 못한 것들을 많이 겪을 수 있게 해 준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 친구와 있으면 매번 많은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어쩌다 생일날 오전 근무를 이 친구와 함께 하게 되었는데,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나를 오분 단위로 전화해서 좀만 늦게 오라고 어디냐고 계속 물어보며 출근을 못하게 하더니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매장에서 생일파티를 해주고, 같이 힘든 일을 겪다가 퇴사해서 쉬고 있는 지금도 만날 때마다 깜짝 선물을 주더니 크리스마스엔 감사하게도 우리 부모님 선물까지 챙겨주더라. 조금 문화 충격이었던 게 나는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그렇게 챙겨본 일이 없었다. 너무 놀랍고 너무 고마웠다. 무드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나는 그냥 선물을 포장도 없이 주고, 밥이나 사주고 했었는데 그게 좀 미안할 정도로.......... 그래도 안 챙기진 않았....... 다는 걸로.. 에엠.


어쨌든 이 친구랑 일주일에 한 번씩 영화관을 가는 게 요즘 내가 가진 취미자 유일한 일탈이 되어버렸다. 처음으로 이렇게 긴 시간을 쉬고 있는데, 여행도 못 가고 아무것도 못하지만 이 친구랑 일주일에 한 번 영화관에서 만나 영화를 보고 밥을 먹는 게 그냥 그게 그렇게 좋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산만한 글을 썼을까. 글을 처음 쓸 때는 이 친구를 만난 것부터 이 친구랑 있었던 일을 써야겠다 했는데, 쓰고 나니 중구난방이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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