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udie Nov 18. 2020

부치지 못한 편지

안녕, 잘 지냈나요.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남겨요. 오늘도 어제보다 조금 더 바람이 차가워졌네요. 이제 곧 하얀 세상이 오려나 봐요. 내가 어렸을 때 얘기를 했던가요. 내가 살던 곳은 유난히 여름이 뜨거운 곳이었어요. 지금 사는 곳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죠. 아주아주 어렸을 땐 눈도 많이 왔던 것 같은데, 학생 때는 눈을 만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기온이 많이 올라 눈이라고 해봐야 싸라기눈 잠깐 내리는 게 다일 정도로. 어쩌다 많은 눈이 내려도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꿈처럼 사라졌어요. 이사를 온 지 오래돼서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어요. 눈이 귀해 동네가 하얗게 되면 새벽까지 꼬맹이들이 뛰어놀아도 아무도 말릴 수 없었어요. 겨우내 바람막이로 충분히 버틸만했을 정도였어요. 그땐 어리기도 했으니까요. 갑자기 눈이 올 거란 생각을 했더니, 왠지 설레네요. 위로 이사를 올라오고 난 뒤엔 눈을 생각보다 많이 만났어요. 처음엔 너무너무 신기했어요. 눈이 오는 것보다, 눈이 오랫동안 녹지 않고 남아있는다는 게. 눈이 뒤덮은 하얀 세상은 눈부시게 예뻐서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실컷 담고 다녔어요. 추운지도 모른 채 말이죠. 쉬는 날에 눈이 왔다고 하면 무조건이요. 자취를 하던 동네에 도서관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도서관 앞에 골목에 쭈르륵 카페가 있었거든요. 근데 그 카페 뒤편에 나무가 쭉 있고 화단이 만들어져 있었어요. 당연히 카페는 통 유리창이었죠. 창에서 보면 숲 속에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곳이었어요. 그 창가에 앉아 눈이 내린 화단에 나무 사이로 비치는 볕은 너무너무 예뻐요. 반짝반짝 정말 보석이 빛나는 것보다 훨씬 반짝였어요. 생각보다 만나기 힘든 장면이지만, 쉬는 날 혼자 카페에 앉아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일주일 치 스트레스가 날아가곤 했어요. 이제 그 자리에서 그 모습을 보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다른 모습의 하얀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생겼어요. 겨울은 당신과의 추억도 참 많아요. 그래서 그런가요. 이렇게 내내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내 기분이 가라앉아요. 당신이 존재할 때 혼자 이 모습들을 보고 느끼는 것과, 당신이 부재일 때 혼자 이 모습들을 보고 느끼는 건 전혀 다르니까요. 혼자인 건 마찬가지라고 하겠죠. 아뇨, 그래도 달라요. 내가 이렇게 예쁜 것들을 봤다고 당신에게 재잘거릴 수 없잖아요, 이제는. 올 겨울은 많이 다를 거예요. 이제는 괜찮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까 봐 겁이 나네요. 늘 이야기하지만 언젠가는 다른 사람으로, 다른 추억으로 덮어지겠죠. 그래요 언젠가는요. 조금 느린 거예요. 그저 그것뿐이에요. 꼭 당신을 기다리는 건 아닐 거예요. 이제 괜찮아져야죠. 이만하면 충분한 거 같아요. 어차피 당신에겐 잊힌 사람일 테니. 잘 지내요. 오늘도 보내지 못하는 편지는 여기까지만 쓸게요. 따뜻한 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꿈에는 이제 찾아오지 않아도 돼요. 따스히, 잘 자요. 안녕.







이제 더는 꿈에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동안 내 꿈에 찾아와 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에겐 아주 먼 길이었을 테죠.

빈 마음으로 꿈에 찾아온다는 건 고통이었을지도 몰라요.

내 곁에 없어도 된다고, 내 옆에만 있어달라고 말하던 

그런 나를 두고 가놓고 선 제멋대로 꿈에 찾아오는 일은 이제 더는 하지 않았음 해요.

그만하면 됐어요. 충분해요. 

아니 이제 내가 부탁할게요.

더는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빈 마음으로 더는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가요. 이제 찾아오지 말아요. 이젠, 나도 편히 잘래요. 안녕.

작가의 이전글 세 번의 축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