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udie Nov 17. 2020

세 번의 축가

두 번의 절연.

세 번의 축가.


 나는 세 번의 축가를 불렀다.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붙어있었던 친구들 중 세명이 먼저 결혼식을 치렀다.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의 가장 큰 선물이 된다는 축가를, 영광스럽게도 세 번이나 경험했다. 


 고등학교 때 7명의 친구가 늘 붙어 다녔다. 밥을 먹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어디 놀러를 갈 때도. 졸업사진마저도 함께 찍은 정말 단짝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 그중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도 있었다. 우리는 정말 개구쟁이처럼 장난을 쳤고, 밥을 먹었고, 추억을 남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어도, 우리는 한 번씩 꼭 고향에서 모여 술 한잔을 기울일 만큼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아빠를 따라 가족과 함께 경기도로 이사를 왔다. 어려서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방에서 생활을 하던 나는 아는 이 없는 새로운 곳에서 적응을 하느라 힘이 들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친구들을 보러 자주 내려가서 그나마 버틸 만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취업준비를 하고 나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회사에 취업했다. 공채로 나름대로 많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를 했으나, 많은 이들의 무시과 무례를 꽤 오랜 시간 버텨야 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사투리를 사용한다는 것과, 서비스 직에서 일을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로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버텨야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이면 그것만으로도 버틸만했다.

본사에 입사를 했지만, 특성상 각 매장으로 파견되어 근무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집에서 그나마 가까웠던, 평택역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평택역으로 발령받고 가장 좋았던 것은 점장님과 선임들의 배려로 휴무 전날 오전 근무를 하고 휴무 다음날 마감 근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퇴근하면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였고, 하루 신나게 놀고 다음날 고향에서 바로 출근하는 식으로 늘 친구들을 만나왔다.


나는 2년제 대학교를 졸업했고, 친구들은 각각 3년제와 4년제를 다녔다. 가장 먼저 취업을 했던 터라 친구들과 술 한잔 할 때면, 먼저 나서서 술을 사곤 했다. 그렇게 유독 내게 많은 것을 바랐던 친구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내내 나에게 많은 것을 바랐다. 신입으로 근무를 하는 것 치고는 수입이 나쁘지 않았던 터라 아무 생각 없이 나도 많은 걸 내어줬던 것 같다. 그게 잘못이었던 걸까. 친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보고 싶어'


 이 한마디에 나는 정말 그 친구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내가 보고 싶다기보다는 필요했던 것 같다. 친구가 다녔던 대학교와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바로 옆에 붙어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뿐 아니라 대학생 때도 종종 만나곤 했었다. 그래서였는지 유독 많이 만났다. 그 친구는 실습생으로 조금 오래 일을 했고, 전공이 3년제였어서 나보다 1년 더 학교를 다녔다. 2년이라는 시간이 내가 빨랐으니 생각보다 조금 오래 차이가 있었다. 그 친구는 학생이었고, 나는 직장인이었던 시간이 2년, 3년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하면 오픈 근무에 다음날 마감이기만 해도, 휴무가 아니어도 그 친구를 만나러 갔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늘 밥을 사줬다.

 친구가 실습을 시작하고 병원에서 일을 하는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그동안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다고 하면 기프티콘이라도 보내줘서라도 꼭 뭐라도 먹였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습관적으로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다고 하거나 술을 한잔 사달라고 내내 조르곤 했다. 연애를 하는 동안에는 연락이 잘 되지 않다가, 그 사람과 헤어지고 다음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내 보고 싶다고 졸라댔다. 술사 달라, 밥사달라 내내 들었던 얘기들이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건 왜 그것뿐인 건지. 그렇게 나는 점점 호구가 되어갔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보면. 부정할 수 없다.


 여느 날처럼 친구가 술을 한잔 사달라고 했고, 나는 다음날이 휴무였던 터라 퇴근하자마자 친구를 만나러 갔다. 우리는 오랜만에 맛있게 밥을 먹고 신나게 놀았다.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셨던 것 같다. 마지막 기억으로 홍합탕에 소주를 마셨다. 얼큰하게 취해 친구네 집으로 가 잠을 청하기로 했고, 술자리를 파하자마자 우리는 친구네 집으로 가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친구네 집으로 가 대충 씻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지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친구네 부모님께 전화가 왔다. 친구는 힘들게 일어나 전화를 받았고, 낯선 환경에 잠에 깊게 들지 못했던 나는 잠이 깨 친구가 통화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친구는 갑자기 놀라 벌떡 일어났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부고를 들어서였다. 전화를 끊고 당황한 친구를 챙겨 먼저 씻으러 보내고 친구가 입고 갈 옷과 양말 같은 것을 옆에서 함께 챙겼다. 사실 가부장적인 아빠 밑에서 자란 나는 장례식장에 가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고, 그때 연락을 하고 있던 오빠에게 물어보며 이것저것 챙겨 보냈다. 점장님께는 죄송하다고 하고 3일 연차를 내고 내내 친구 곁을 지켰다. 처음으로 장례식장에 갔고, 어찌할 줄을 몰랐지만 내내 함께여야 한단 생각으로 있었던 것 같다.

 그 친구에게 유독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정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친구를 챙겼다. 그 친구도 내게 그런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에 대부분의 지출을 했을 정도로 나는 친구들을 챙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왜 그랬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각자의 연애를 했고,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7명은 점점 각자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느라 점점 멀어졌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느라 점점 친구들에게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7명이 시간이 되면 종종 만나곤 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20대를 거의 보냈다.


 20대 후반이 되고,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에 대한 이야기들을 꺼내왔다. 그러다 두 친구가 먼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오래된 연애를 정리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자마자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친구 모두에게. 그것도 아주 귀한 새 생명과 함께. 가족을 꾸린다는 말에 부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친구들도 나도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 너무 축하할 일이긴 했지만, 그때의 나는 여러 가지로 매우 힘든 상화이었다. 축하를 해주고 싶지만, 쉽지 않았다. 금전적으로나 일이나, 건강 어떤 것도 완전한 게 없었다. 축하는 하지만 결혼식 참석은 힘들 것 같다고 미안함을 전했다. 하지만 친구는 울면서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내내 밤늦게 전화해 졸라댔다. 네가 아니면 누가 축가를 불러주냐. 다른 것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의 한 번뿐인 결혼식에 축가는 너였으면 좋겠다. 울면서 매일매일 오는 전화에 너무 미안해 결국 축가를 하기로 했다. 


 두 명의 축가를 한 달도 채 안돼서 하게 되었다. 축의금을 낼 돈도 없었고, 당시 고양시에 살고 있었던 나는 부산과 구미를 갈 교통비 조차 없었다. 축의금을 낼 형편도 못됐고, 친구들의 결혼식이 너무 멀리서 진행되는 바람에 교통비 조차도 부담스러웠다. 친구들이 교통비는 대 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오라고 해서 그러겠다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형편이 나아지면 나중에 선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번의 결혼식, 두 번의 축가를 불렀다. 그때까지는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형편이 되지 않아 할 수 없다고 전했던 내 말이 서운했을까. 아니면 축의금조차 낼 수 없던 내가 싫었던 걸까. 축가를 부르면 축가를 부른 사람에게 부부가 선물을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나는 축가도 부르고 축의금도 냈어야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잘못한 거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당장의 현실이 너무 컴컴했기 때문에 괜찮아지면 선물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줄 몰랐다. 두 사람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부터 나와 연락을 하지 않으려 했고, 대놓고 내 욕을 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친구가 화가 나서 내게 전해줬던 이야기 들이 생각보다 많이 충격적이었다. 오래된 친구가 결혼을 하는데 남들은 값비싼 선물을 한다는데 나는 그런 것도 없으면서 축의금도 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왠지 모르게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하는 수 없었다. 내 상황은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많이 서운하고 속상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친구들은 우연찮게도 같이 신혼여행을 다녀오게 되었고, 두 사람은 같은 기간 신혼여행을 끝내고 단체 톡방에서 신나게 후일담을 이야기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함께 다녀왔으니 추억도 두배가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친구들의 자랑을 말없이 보고 있다가 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미안한데 나 지금 부산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내려가고 있다고 전했다. 퇴근을 하는 길에 들은 부고라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야. 우리 이제 신혼여행 갔다 왔는데 꼭 그렇게 말을 해야겠어?'

'맞아, 한 번뿐인 신혼여행인데 갔다 오자마자 분위기 흐려야 돼?'

'우리 지금 신혼여행 갔다 온 거 신나게 얘기하는데 그런 말 꼭 해야 해?'

'너 우리 결혼 때부터 왜 그래 도대체? 기분 나쁘게.'

'분위기 흐리지 말고 그럴 거면 단톡 나가.'

'그래 너 툭하면 단톡 나가잖아, 그냥 나가.'


 할머니의 부고를 지나칠 수 없어 없던 휴가까지 내서 내내 붙어있었던 친구에게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 단 한 번의 결혼식이라는 것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미안한 마음이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그 말이 엄청난 상처가 되었다. 그 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뱉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게 나는 단체톡을 나왔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멀리에 살고 있던 다른 친구들에겐 안부의 연락만 받았다. 그렇게 그 두 사람과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그 두 사람에게만 연락을 하던 한 친구와도 그렇게 멀어졌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세 번째 축가를 불렀다.


 두 번의 축가에 대한 트라우마로 세 번째 축가는 부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세 번째 축가를 맡은 건, 내가 정말 의지했던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이 친구의 결혼식만큼은 최선을 다해 축하해주고 싶었다. 친구는 내 모든 상황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었기 때문에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내게 '네가 축가를 불러준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 그런 일들이 있어서 부담스러울 것 같아 부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역시 네가 축하를 해줬으면 좋겠어. 축의금은 그걸로 충분해. 와서 축하해주고 밥 한 끼 맛있게 먹고 갔으면 좋겠어. 부탁해도 될까?' 거절을 하기 미안할 만큼 따뜻한 말로 내게 부탁을 했고, 나는 마지막이 될 축가를 부르기로 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축가를 준비할 시간은 한 달 남짓.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많이 연습하려고 했던 것 같다. 휴무가 되면 한번 연습을 할 때 대여섯 시간은 기본으로 연습했다.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축가에 대한 불안감으로 연습은 결혼식이 다가오는 만큼 더 열심히 했다. 친구의 결혼식에 민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마지막 축가를 불렀던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쭉 단짝이었기도 했지만, 내가 자취를 하고 감정노동을 하는 동안 떨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달려와 준 고마운 친구였다. 그래서 였는지 더 누가 되고 싶지 않았다. 목에 피맛이 날 정도로 연습을 했던 것 같다. 잠을 잘 시간도 줄였다. 기억력이 좋지 않았던 나는 가사를 프린트해 혹시나 틀리지 않기 위해 신경 썼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친구의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마땅히 축의금도 할 수 없었던 내게 친구는 네가 축가를 불러줘서 너무 고맙다고만 했다. 친구의 얼굴을 보니 정말 미안한 마음이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떨리는 축가는 무사히 끝이 났고, 다행스럽게도 친구네 가족 친지분들께서도 만족스러워하셨다. 아직도 종종 내 이야기를 하시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주실 만큼. 정말 무사히 지나갔다. 그렇게 축가가 끝나고 그제야 결혼식에 참석한 친구를 봤다. 이전에 결혼한 친구 중 한 명은 오지 않고, 한 명은 왔다. 그중 친구 결혼식에 온 그 친구가 내가 내내 유독 챙겼던 그 친구였다. 어색한 식사자리가 끝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7명의 친구가 붙어 다녔다. 유치하게도 이름은 칠공주파였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디즈니 공주 캐릭터를 갖다 붙이고 유치하게 불렀던 것 같다.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중 세명과 절연을 했고, 나머지 세명과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세 번째 축가를 부르게 되었고, 그 친구의 결혼식에 먼저 결혼을 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친구가 모였다. 3명이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함께 올라왔고, 나랑 다른 친구는 전철을 타고 이동했다. 돌아갈 때도 각자의 교통수단으로 돌아갔다.

 지방에서 올라왔던 친구 중 두 사람이 기차를 타는 내내 내 욕을 했고, 그걸 듣고 있던 한 명이 두 사람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나서야 일단락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 친구도 내게 등을 돌린 세 사람과의 인연을 정리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던 걸까. 내가 그 정도로 잘못을 한 걸까. 내내 생각이 많았다.

우습게도 그 친구는 아이 돌 때쯤 슬쩍 내게 연락이 오더라. 또 내가 필요했겠지. 나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고, 그대로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연락이 온 sns를 차단했고, 내가 필요할 때마다 내 소식을 궁금해했다고 한다.


 축가. 그게 뭐라고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내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던 사람들이 본인이 필요할 때는 열심히 찾았다는 게 너무너무 충격이었다. 이렇게 허무한 관계가 축가로 정리된 것 같다. 어쩌면 축가 덕분에 진짜 친구와 가짜 친구를 거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오래된 관계라고 해도,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용하려고만 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이용할 수 있을 때만, 필요할 때만 가치가 있는 관계라는 것을 너무 아프게 깨달았다. 10여 년을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내가 그들에겐 소중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길고 지루했던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곱씹고 써내려 오면서 다시 생각해봤지만, 정말 다시는 축가를 부르고 싶지 않다. 정말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것을 내어주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 사람에게 나는 필요 이상의 어떤 것인지. 가치가 있을 때만 이용되는 관계는 아닌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던 사건인 것 같다. 다시 생각해봐도. 어쩌면 그 사람에 대해, 그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이런 식으로의 관계를 맺어온 그 친구들의 곁에는 필요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은 이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또 그랬으면 좋겠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생각해본다. 후회로 물든 시간을 앞으로 보냈으면 좋겠다. 


소중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을 다하지 마세요.


 제 경험으로는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에 나를 전부 쏟아내지 마세요. 그것만큼 허무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돌아보면 남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굳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옆에 남아 줄 사람은 남는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분명. 나를 위해 마음을 남겨두세요.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쏟아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지루한 이야기가 본인의 인간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