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분명, 더 짙어지는 것들이 있다. 달리는 시간의 뒤에 따라온 어두운 그림자. 어떨 땐 완전히 사라졌다가도, 다시 또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것. 무심코 지났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다시 또, 또렷해지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는 사람이 그랬다. 이젠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결국 괜찮지 않았다. 그 사람과의 문제에서 겪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나, 그 문제를 겪었던 장소와 비슷한 장소가. 그 장면들이 겹치는 어떤 상태가 되면 거기서부터 밀려오는 공포가 컴컴한 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파도가 잔뜩 성난 상태로 내게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잔잔한 척을 하며 나를 삼키러 오는 그 까만 파도가 내 가슴을 숨 막히게 꽉 쥐는 것 같았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그런 것들은 마음의 나약함에서 오는 아주 약하고 한심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날 만큼 지났음에도 그런 문제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오는 문제는, 분명 그것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다는 말. 그리고 그것도 결국 약한 마음을 가진 자신의 탓이라는 말.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의 밤, 나의 바다에 파도가 더 세차게 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도 없는 컴컴한 바닷가에 가로등 하나 없이, 오롯이 혼자 그 까만 파도를 감당해야 할 것 같은 기분. 뻘에 박혀 도망하지 못하고, 그대로 들어오는 파도를 홀로 견디고 있는 것 같은 그 기분. 그 기분에서부터 오는 공포에, 나는 점점 더 작아진다. 그렇게 작아진 나에게, 잔뜩 움츠러든 나의 마음에게. 결국 그래도 괜찮다는 말 대신 주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나에게 돌팔매질을 한다. 잔잔해지는 중이라 믿었던 시간들이 또 한 번 그 돌팔매질로 잔뜩 출렁인다. 이것이 시간이 약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다. 괜찮아질 만할 때쯤 다시 내게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 왜 그런 것들에 나약하게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냐는 말. 잔잔하게 유지하려 애썼던, 애써 바람 한 점 없다고 믿고 있었던,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고요한 일상이 매번 그로부터 깨져버렸다. 마치 재생된 테이프를 되감기라도 한 듯, 나는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 시간의 뒤에서 서서히 옅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 번씩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니 어찌 그 장면들이, 시간의 뒤에 선 그림자가. 옅어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괜찮아진다는 말에도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더 분명 해지는 생각이 있다면, 밀려오는 파도를 견디고 있는 중이라면,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파도가 세차게 밀려오고, 깊은 뻘에 박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갇혀 그것들을 견뎌야 하는 중에 놓인 사람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결국엔 늘,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시간이 약이 될 수는 없다. 물론 때에 따라 시간의 그림자가 옅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에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니 꼭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파도가 밀려오면 그냥 좀, 같이 떠내려 가도 괜찮다. 그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파도가 세차게 치는 그곳에서, 나 자신만 잃지 않으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겠지만, 괜찮아져야 한다는 강박에 너무 애쓰지 말았으면 한다.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질 테니. 파도는 더 세차 질 테니. 선명해지는 장면에 눈을 감지 말고, 눈을 맞춘 채로. 그대로 그 시간을 견디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캄캄한 밤, 세찬 파도와 돌팔매질에 부디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견뎌 쓴 웃음이라도 언젠가 꼭 지을 수 있길 바란다. 나는 내가, 당신이. 그것들에, 지지 않길 바란다. 이것 또한 모순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