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꽃눈 나리는 계절에

오늘도 닿지 않을 편지를 써.

by maudie

안녕, 오랜만이야. 이렇게 또 닿지 않을 편지를 쓰는 밤이야. 꽃눈이 내리는 계절이 지나고 있어. 벚꽃 눈이 지고 이제는 등나무 꽃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어. 너도 그곳에서 등나무 꽃눈을 만날 수 있겠지.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 보랏빛을 한 등나무 꽃이 잔뜩 피었더라. 라일락만큼이나 진하고 묵직한 향이 동네를 덮어. 어찌나 향기로운지 은근한 향에 중독되어, 코로나로 들어가지 말라고 줄이 쳐져 있는 그곳을 매일 가서 그 줄 바깥에 서서 한참을 킁킁 거려. 조금이라도 향을 맡으려고. 조금이라도 더 꽃눈이 되어 다 사라지기 전에, 여기저기 흩날려 짙은 향에 취하지 못하게 되기 전에. 잠시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더 취해있고 싶어서 매일을 그곳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눈을 감고, 차마 마스크는 내리지 못하고 한참을 머물다 와. 오늘 저녁에는 조금 날이 춥더라. 그래서 오래 취해있지 못하고 금세 돌아와야만 했어. 내일이면 비가 온다는데, 아마도 보랏빛 눈도 함께 내리겠지. 멀리서 보면 포도알 같고, 하나씩 떼어보면 팝콘 같은 귀여운 꽃인데, 향은 귀여움과 거리가 멀어. 묵직한 향에 좀 더 오래 취하고 싶었는데, 너무너무 아쉬운 밤이야. 해가 뜨기 전 아무도 없는 컴컴한 새벽에 겁이 많아 대문 밖을 혼자 나서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한 번 더 다녀올까 고민이 될 정도로. 내일 아침이 밝으면 거짓말처럼 눈나리듯 흩날리고 없겠지. 아마도 무거운 빗방울이 다 떨어뜨렸을 거야. 네가 내게 그랬듯이 말이야. 잔인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진해지는 너의 향도 저 등나무처럼 묵직해. 쉽게 잊히지가 않아서 다시 취하고픈 마음에 머릿속에 들어앉아 영화를 재생하듯 또 너를 재생하곤 해. 그러면 혹시 기억 속의 향이 슬쩍 코끝을 스치지 않을까란 생각에. 사실, 얼마 전 오랜만에 너를 아는 친구를 만났어.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다시 너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날이 있다면 분명 그날 나는 너를 붙잡을 거라고. 다시 너를 오래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너의 손을 붙잡고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렸다고 말할 거라고. 우리의 결말이었던, 아니 결말이 아니길 바라는 그때. 너와 인연이 다시는 닿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문장의 마침표가 쉼표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너에 관한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버렸지. 내손으로. 이렇게나 후회를 할지도 모르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우리의 마침표가 쉼표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내가 아무리 지금 그 마침표가 쉼표였길 바란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의 문장은 마침표였을텐데 하는 생각. 마침표를 찾아 몰래 쉼표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야. 너와의 결말을 아는 친구는 내게 미친년이냐고,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욕을 퍼부었지만. 너는 정말 나쁜 사람이니 정신 차리라고 내게 화를 냈지만. 나는, 나는 말이야. 나는 요즘따라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너에게 배운 사소한 것에 대한 소중함이 여전히 남아서 곁을 맴돌아. 그래도 너를 만나면서 나는 나로서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누구의 나도 아닌 그냥 오롯이 나 자체로 행복했었어.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어.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그냥 오롯이 나 그대로 나를 볼 수 있게 해 줬어.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이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참 신기하게도 그런 거더라. 네가 남기고 간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내가 나로서 나를 바로 보고,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네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의 결말에 찍은 마침표가 얼마나 강했는지 잊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때의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유로 아니 그 핑계로 너와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냥 그런 거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거 잘 알지만, 시간이 많이도 흘렀지만, 그렇지만. 우연히라도 너를 만나면 우리의 문장에 꼬리를 달자고 이야기할래. 그럴래. 그러고 싶어. 너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래. 그냥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 어차피 이 편지도 내 마음처럼 네게로 가 닿지 않겠지만.




P.S.

너에게도 내가 등나무 꽃눈처럼 계절이 돌아 기억나는 짙은 그리움이길 바라.

너에게도 나는 여전히 등나무 꽃 향처럼 짙고, 선명한 사람이길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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