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그린 그림

번지지 않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 그게 무슨 색이던 말야.

by maudie

나라는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가 좋아하는 노랑과 초록으로 색을 채웠다. 그 위에 더 좋아하는 파랑을 덮었다. 여기저기 군데군데 꽃피길 바라는 마음으로 빨강과 보라도 채워 넣었다. 물론, 가장 예쁜 꽃이 될 하얀색도 포인트로 그려 넣었다. 노랑과 초록으로 그리다 파랑을 덮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파랑 위에 다시 노랗게 해도 그려 넣었다. 초록으로 칠한 도화지 아랫부분에는 계속 꽃을 채워 넣었다. 알록달록 꽃을 그려 넣을 땐, 밋밋하지 않은 것들이 참 예뻐 보였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꽃이 군락을 이뤘고, 그러다 색이 섞여 결국 꽃이 시들어 버렸다. 색들이 겹쳐 다 번져 버렸다. 조금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하얗게 얹은 꽃은 결국 그 색들에 물들어 버렸다. 남은 내 마음이라 생각했는데, 다 번지고 섞여 결국은 처음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분명 예쁜 것들을 담았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다 모든 색이 완전히 섞여 버렸고,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하얗던 도화지는 색이 엉망이 되었고,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남은 나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내가 담으려 했던 색은 이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에 다시 시작해보려 했지만, 남은 흔적들에 어떤 색도 빛을 낼 수 없었다. 색을 덧칠하면 덧칠할수록 온 마음이 얼룩덜룩 해질 뿐. 나는 그것들을 조금 더 멀리 두고 보기로 했다. 휴식을 가지고 천천히. 그리고 결론이 생각나지 않아 결국 그 도화지 위에 검은색을 덮어버렸다. 캄캄하게. 차라리 저 얼룩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덮어버렸다. 도화지는 결국 까맣게 되었고, 나는 우선 물감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젖은 마음에 그린 색이 다시 번지지 않도록. 어느 정도 물기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이른 마음으로 까만색이 된 도화지에 하얀 별을 찍어 그렸다. 급한 마음에 제대로 마르지 않았던 건지 하얀 별은 또다시 번지기 시작했다. 새로 무언가를 시작한단 마음이 금세 다시 무너져 내렸고,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다시 까만색으로 덮길 여러 번.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햇볕도 보고 그늘도 만났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마를 만큼 말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르고 나니 속에 있던 색들이 비집고 나와 얼룩을 만들었다. 새카만 도화지에 중간중간 섞인 오묘한 색. 나는 아무렴 어때, 나의 상처들도 언젠간 빛을 낼 텐데. 더 이상 기다렸다간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할 거란 생각에 다시 별을 그리기 시작했다. 온전히 짙은 까만색이었다면 오히려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어떤 색도 바람에 옅어지기 마련이니, 조금 빨리 색이 바랜 거라 생각하자고. 그렇게 하나 둘 다시 별을 그려 넣고, 달을 그릴 자리만 남겨뒀다. 별들과 섞여 달을 찾지 못하게 될까 봐.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꽃과 해처럼 다 섞여 버리면, 다시 시작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만 같다. 언젠간 나의 달도 이전의 해처럼 다시 뜨겠지.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다. 바람에 젖은 마음이 마르면, 그때. 그때 다시 그리면 된다. 그런 마음으로 자릴 남겨 둔다. 조금은 얼룩덜룩하지만, 언젠간 그것도 사랑받을 날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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