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udie Nov 23. 2020

12월 23일

친구의 결혼식, 그리고 너.

친구가 결혼을 한다. 나의 소중한 인연이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 생각이 참 많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벌써 세 번째 결혼식. 친구들이 하나둘 시집을 간다는 게 참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솔직히 친구들 중에 내가 제일 먼저 결혼을 할 줄 알았다. 친구들도 늘 그렇게 말했다. 어려서부터 결혼을 하고 싶어 하기도 했고, 오랜 연애를 해왔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5년의 연애를 했던 사람과 결혼을 꿈꿔왔었으니까.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에 변화가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날이다. 친구의 축가를 부르는 날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사람을 만나는 날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유독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결혼식장에 갈 준비를 하고 머리를 하기로 했다. 아침에 미용실이 10시에 오픈하니 간단히 드라이만 하고 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야, 빨리빨리 좀 준비해 미용실 가야 된다니깐.'

-  다돼가여, 좀만 기달려. 다했어, 다했어! 니는 다 챙깃나

'어어어, 다 챙깃지 니 가사 종이 어쨌노? 도고.'

- 어, 여있다. 잃어버리지 말고, 잘 챙겨라.

'어어어, 알아하께. 얼렁 가자.'


우리는 급하게 준비를 마무리하고, 자취방 근처에 위치한 미용실로 향했다. 우리는 미리 준비를 다했어서, 고데기로 드라이만 했다. 머리는 생각보다 예쁘게 나왔고, 다시 급하게 전철을 타러 갔다. 결혼하는 친구 옆에서 호방이는 가방순이를 해주기로 했고, 나는 그 시간에 근처 코노에서 목을 풀기로 했다. 우리는 생각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 같아서 각자의 이유로 불안해했다. 그렇게 동대문역에서 내렸다. 예식장은 다행스럽게도 역사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고, 곧바로 호방이는 달려서 그날의 주인공인 윤정이에게로 갔다. 나는 호방이가 가는 것을 보고 코노를 찾기로 했다. 예식장 근처에 딱히 다른 것은 없고, 영화관이 하나 있었다. 제발 코노가 있기를 바랐다. 그 주변에서 노래방 시설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매표소 근처에는 딱히 편의 시설이 보이지 않았고, 폭풍 검색한 끝에 영화관 매표소가 있는 층 위층에 오락실이 있다고 해서 바로 올라갔다. 조금 낡고 비좁긴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겨울에 땀이 뻘뻘 날 정도로 더웠지만 열심히 목을 풀었다.



세상이 그리 쉽지 않아 몇 번씩 넘어지고 할지 몰라

꼭 잡은 두 손만 놓치지 않고서 함께 가면 돼

내리는 비를 막아줄 수는 없지만

비가 오면 항상 함께 맞아 줄게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이 있어도 함께 할게

물론 모든 걸 다 줄 수는 없지만 작은 행복에 미소 짓게 해 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편이 돼 줄게 언제까지나


- '지아 - 물론'



가사가 정말 예쁜 곡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편이 되어준다라는 말이 그 어떤 말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프러포즈인 것 같았다. 한 시간가량의 연습이 끝이 나고, 미리 준비하기 위해 예식장으로 내려갔다. 대구에서 온 친구들도 이미 와 자리를 하고 있었다. 윤정이와 간단히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예식장 대기실 구석에서 목을 가다듬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식 진행을 도와주는 직원분이 나를 찾았다.


- 축가 부르기로 하신 분 이신가요?

'아, 네. 저에요. 지금 준비해야 하나요?'

- 네 우선 먼저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 MR은 말씀하신 곡으로 준비해뒀고요, 축가를 신랑 측 앞에서 불러야 해서 자리는 이쪽에 앉으셔야 해요.

'아, 여기요? 네네.'

- 다른 거 필요하신 거 있으실까요?

'아, 저 혹시 가사를 다 못 외웠는데 이거 종이 둘 곳이 있을까요?'

- 아, 그러면 악보 두는 걸로 준비해 드릴게요. 원래는 노래를 맞춰서 불러봐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잠깐 테스트만 해볼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아주 잠깐의 반주 소리 크기와 마이크 소리만 테스트를 해 볼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교차했다. 생각보다 하객이 훨씬 많았다. 복도에도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축가를 시작하기 전까지 이동하지 말 것을 당부받아서 신부를 한 번 더 보러 갈 수도, 신부 측에 앉아있는 친구들 옆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극강의 긴장감으로 숨이 막혔다. '후 -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마음의 주문을 외우던 찰나에 바로 앞좌석에 앉아있던 신랑의 가족분이 인사를 건네주셨다.


- 안녕하세요. 말씀 들었어요~ 축가 불러주신다고요. 잘 부탁드려요.ㅎ

'아, 네 안녕하세요! ㅎㅎ 아, 네네.. 축하드려요! 열심히 할게요!'

- ㅎㅎ 네 감사합니다.


신랑 형 분과 이야기를 했더니 왠지 더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잠시 뒤에 오늘의 주인공인 세상 예쁜 내 친구 윤정이가 걸어 들어왔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청심환을 두 개나 먹었는데도, 신부를 제대로 쳐다도 보지 못했다. 나중에 그날의 결혼식이 제대로 다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예식은 시작되었고, 신랑 신부는 너무 잘 어울렸다. 웃는 모습이 닮은 두 사람이 정말 예뻤다. 긴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눌렀다. '어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내내 바들바들 떨었다. 


- 두 사람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신부의 절친이 축가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짝짝짝) 오~ 오늘 먼저 결혼하는 친구에게 한마디 해주시겠습니까?

'후 - 노래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준비했어요. 결혼 축하해! (울컥) 후 - 윤정아, 잘살아.ㅎㅎ'

- 자, 그럼 시간 없으니까 얼른 들어볼까요?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노래가 끝났고, 다행스럽게도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다. 많이 긴장된 탓에 바들바들 떨긴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지나갔다. 무대에서 내려오고, 박수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신랑의 형이 '노래 정말 잘 들었어요, 진짜 감동이었어요! 감사해요. 진짜 노래 잘하시네요.ㅎㅎ' 하고 인사를 건데 주었고, 식이 끝나고는 윤정이 시아버님께서도 같은 인사를 건네주셨다. 무엇보다 감동이었던 건, 시아버님께서 직접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말씀해주시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주셨다는 것이었다. 나이 많은 어른이 이렇게 감사 인사를 해주시는 것이 처음이라 너무 놀랍고 감사했다. 오히려 내가 감동을 받았다. 축가가 끝나고 나서야 예식을 즐길 수 있었다. 신랑은 열심히 준비한 춤으로 분위기를 띄웠고, 윤정이는 내내 세상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예식이 끝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보여 식사를 했다.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대구에서 올라온 한 친구가 전해온 소식이 조금 불편했지만,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너무너무 기분 좋았다.


- 예식은 잘 끝났어요? 축가는 안 떨고 잘했어?

'응응. 진짜, 너무너무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어요.'

- ㅎㅎ 다행이네, 친구가 진짜 좋아했겠다.

'응, 아까 엄청 고맙다구 하더라구, 친구 시아버님이랑 시아주버님께도 칭찬받았어요! 히히.'

- 오~ 나도 담에 들려줘요!

' 히히. 응 알겠어요! 어디예요? 오구 있어요?'

- 응 가구 있어요. 긴장된다 ㅎㅎ

'하, 내가 더 긴장되는 거 알죠? 나 지금 아침 6시부터 지금까지 긴장 중이라고.'

- 그건 축가 때문이잖아 ㅎㅎ

'아~ 아니에요! 물론 축가두 무지무지 긴장됐지만,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요!'

-오~ 그럼 뭐 때문인데? 

'있어요,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 사람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긴장되네요.'

-오! 그 사람은 좋겠다. ㅎㅎ

'아? 진짜요? 후. 그 사람이 도망만 안 갔으면 좋겠어요.'

- 분명 그 사람 누나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두 팔 벌리고 있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그 사람이 두 팔 안 벌리면 뒷걸음 질을 칠까요?'

- 어? 그건 안돼요.

' 그러면 그 사람이 두 팔 안 벌리면, 강제로 벌릴까요?

- 뒷걸음질 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요? ㅎㅎ 나 안아줄 준비됐어요?

'아아. 진짜로 나는데 거짓말 안 하고 낯을 너무 가려서. 못 안아줄 것 같은데, 재영 씨가 안아주면 안돼요?'

- 안돼요. 무조건. 누나가 나 안아줘야 돼요. 내가 두 팔 벌리고 웃으면서 서있을 테니까. 안아줘요. 알았죠?

'아... 도망갈까... 너무 어려운 미션이다.'

- 누나가 그랬잖아요, 나 안아준다고. 나 지금 그래서 누나 보러 가고 있잖아.

'아.. 아니! 진짜 너무너무 어렵다고요. 힝.'

- 괜찮아요. 안 잡아먹어요. 그냥 안아주면 돼요. 알았죠?

' 와...... 진짜로. 내가 잡아먹을지도 몰라요. 재영 씨 긴장해요! 알았죠?'

- 안아주기나 하고, 그런 말 하시죠. 누나. 

'아, 몰라요. 몰라! 나도 잘 모르겠어어어어어어어어! 그나저나 뭐 입었어요? 추운데 따뜻하게 입었어요?'

- 누나가 코트 입은 남자 좋아한다고 해서, 오래된 코트 꺼내 입었는데. 어렸을 때 입었던 거라 좀 이상하네요.

'앙? 코트? 무슨 색인데?? 왜 이상해?'

- 파란색이요, 파란색. 그때보다 몸이 커졌나 ㅎㅎ 좀 작아요.

'ㅎㅎ 예쁘겠다, 어떤 모습이어도 예쁠 거예요.'

- 그럼 걱정 안 해도 되겠네? 

' 무슨 걱정이요?'

- 누나가 안 안아주고, 도망갈까 봐 걱정 안 해도 되겠다고 ㅎㅎ 나 이제 내려요. 내려서 전화할게요.


카톡을 주고받으며, 긴장한 상태로 밥을 먹고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윤정이는 부디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고 인사를 건넸고, 신랑은 축가 너무 잘 들었다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마무리하고 예식장을 먼저 빠져나왔다. 화장실에 가서 양치를 하고, 화장을 고쳤다. 조금 있으니, 전화가 울렸다.


"누나, 어디예요?"

'응, 나 지금 나가요. 어디예요?'

"나, 지금 동대문역 3번 출구 앞이에요.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와요."

'응응 얼른 나갈게요, 어차피 바로 앞이야.'


예식장에 온다고 구두를 신었더니, 빨리 갈 수가 없었지만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그를 찾기 위해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빠져나왔는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어디예요? 나, 나왔는데? 재영 씨 안 보이는데?'

"나, 여기 있어요. ㅎ"

'아, 찾았다 ㅎㅎ '


그가 눈 앞에 보이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그는 나를 보고 웃고 있었지만, 차마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한 이미지와는 조금 많이 달랐다. '아,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본 그는 몸에 맞지 않은 짧아진 파란색 코트를 입고 컨버스를 신고 있었고, 큰 키에 깡마른 사람이었다. 예쁘게 마른 게 아니라 아주 깡 마른 사람이었다. 얼굴빛은 며칠 밤을 새우고 시험을 준비했던 것 때문인지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와 있었고, 얼굴은 검었다. 사진 속의 인물과는 많이 달랐다. 사진 속에 있던 사람은 어느 정도 통통한 얼굴에 뽀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웃는 그의 얼굴이 예뻤다. 어색함에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렇게 웃어줘서 기분이 좋았지만, 차마 다가설 용기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쭈뼛쭈뼛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그가 다가와서 팔을 벌렸다. 나는 그걸 보고도 망설였다. '예의상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연애를 하고 나서 드는 생각이라곤, 오랫동안 옆에 있었던 사람도 모른다는 거였다. 


"누나, 나 마음에 안 들어요?"


잠시 망설이는 동안 그가 내게 말했다. 나는 긴장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고 발게진 얼굴로 씩 웃었다.


'아, 아니 이... 그건 아니고...ㅎㅎ'

"근데, 왜 안 안아줘. 빨리 안아줘. 약속했잖아요. 뒷걸음질 안치면 안아준다고."

'어? 어어.....ㅎㅎㅎ 그렇지........ 만...'


말끝을 흐리고 있으니, 그가 나를 당겨 안았다.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누나는. 설마 나 싫은 거 아니죠?"

'아, 아니 이..! 싫은 거 아니죠! 예.... 뻐요, 예뻐!'

"근데, 왜 안 안아줘요. 너무하네! 내가 팔 벌리면 안아준 댔잖아요."

( 꽁! 하고 이마를 때렸다.)

'아야! 왜 때려요 오우! 넘모 하네에! 힝. 아프자 나아... 헛어..'

"벌이예요, 벌. 도망가려고 했죠? 그러려고 했네, 그러려고 했어."

'아니 그든 여...... 그런 거 아니 라그여!'

"일로 와봐요. (속닥속닥) 그거 알아요? 누나, 예뻐요. 참 귀여워요."

'!@#$%$#!@#$$%^&*??'

"응? 뭐라고요? 뭐라는 거야, 이 쪼꼬만 게."

'!@#$$%$#@ 아니! 숨 막힌다고, 힝.'

"알았어, 이제 갈까요? 누나? 자, 손 잡아요. 추우니까."

'알았어요 ㅎㅎ 가요.'


우리는 그렇게 손을 잡고 전철을 타러 이동했다. 전철을 타고 동대문에서 합정동으로 넘어갔다. 사실 서울에 아는 곳이 많지 않았고, 다니던 회사가 합정동이어서 그쪽에서 놀기로 했다. 만나기 전에, 약 한 달가량의 시간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저녁에 만나게 되면, 너무 늦게 까지 추운데 밖에서 돌아다닐 수도 없으니, 숙소를 예약했다. 호텔에서 영화 보고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에게 별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잘 안되면 혼자 호텔에서 쉬면 되니까, 그것도 상관없었다. 만나보기도 전에 겁도 없이 호텔을 예약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사람에게는 별로 겁이 나지는 않았다. 단지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가버리면, 친구를 불러 호캉스나 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예약해뒀었다. 전철을 타고 오는 내내 그는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내내 웃어주고,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면 자기 품으로 당겨 안았다. 추운 날이었는데, 전철이 너무 덥게 느껴졌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내내 얼굴이 빨갛다며 놀렸다.


"누나, 얼굴 터질 거 같아요. 토마톤데, 토마토? ㅎㅎㅎㅎ 괜찮아요? 쓰러지는 거 아니죠?"

'아, 왜. 뭐! 보지 마요! 보지 마! 저리 가 저리저리 훠이.'

"어어? 나 가요? 나 저리 가요? 아 너무 하네!"


내내 장난을 치느라 금세 합정역에 도착했다. 이 사람과 5년을 만났던 사람이 내내 비교됐다. 전철을 내리면서 다시 그는 나의 손을 잡았다. 내가 넘어질까 봐 몹시 신경 쓰는 얼굴이었다. 5년을 만났던 사람은 어딜 가면 항상 차로 이동을 했고, 차에서 거의 내리지 않았다. 어쩌다가 함께 걷던 날이면, 먼저 저만치 걸어가서는 빨리 오라고 재촉만 했다. 사실 나는 지병이 있었다. 심장으로 피가 잘 올라오지 않았다. 심장으로 피가 올라와도 그 피가 금방 내려가지 않게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부분이 망가져서 빨리 걷는 일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구두를 신은 탓에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걸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나는 내 모든 단점을 쏟아냈고, 그는 그런 것들은 자기가 옆에서 도와주고, 신경 써주면 되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누구나 단점과 문제는 가지고 있다고. 그는 걷는 내내 나를 붙잡아 주었다. 넘어질까 걱정이 됐는지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누나, 그렇게 높은 신발 신어도 괜찮아요? 운동화 신지 그랬어요."

'응, 아니 괜찮아요. 매일 신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결혼식장에 축가 부르러 가면서 운동화를 신어요.ㅎㅎ 괜찮아.'

"아유, 발 아프겠다.ㅎㅎ 그래도 예뻐요, 누나. 넘어지려고 하면 내가 안아주면 되지, 뭐. 그렇지? ㅎ"

'어이구... 그런 말을 참 잘도 하네요.ㅎㅎㅎ'

"우리, 추우니까 근처에 카페 들어갈까요? 누나 커피 좋아하잖아."

'응, 그래요. ㅎㅎ 좋아요.'


딸랑-

"어서 오세요. 주문은 자리 정하시고, 앞쪽에서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네네. 자, 누나 안쪽에 앉아요."

'응, 고마워요. 히 따뜻하다~'

"누나, 뭐 마실 거예요? 라테?"

'응, 나 라테 마실래요. 여기 따뜻하니까 차가운 거 마실래.'

"응, 알겠어요ㅎ 내가 주문하고, 화장실 다녀올게요."

'아, 정말요? 응응 고마워요. ㅎㅎ'


그는 가지고 온 가방을 내려놓고, 커피를 주문하고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사이 카톡으로 친구가 계속 그 사람 어떠냐고 물어서 나중에 연락 주겠다고 하고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가방에 넣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음료가 나왔다.


"주문하신 아이스 라테 두 잔 드릴게요"

'앗, 감사합니다'

"ㅎㅎ 네, 맛있게 드세요."

"어, 커피 벌써 나왔네요.ㅎㅎ"

'아, 응응! 커피 나왔어요 ㅎㅎ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ㅎㅎ 응, 아참. 누나."

'응? 왜요오? ㅎ'

"음, 사실은요. 누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 친구한테 부탁해서, 옷을 같이 사러 갔어요. 코트랑 입을 옷이 없어서."

'아, 진짜? 아 그럼 지금 입고 있는 폴라 티가 그때 산 그거예요?'

"응응, ㅎㅎ 어때요? 괜찮아요? 안이 상하죠?"

'응 ㅎㅎ 예뻐요.'

" 그리고, 누나를 만나러 오면서 뭔가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거......"


그는 슬쩍 웃으면서 가방 안에 가지고 온 선물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선물은 예쁘게 박스 포장된 디퓨저와 직접 쓴 손편지였다. 다른 것 보다 손편지를 써줬다는 게 너무너무 감동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에 내게 주고 싶었다며 친구 여자 친구에게 밥을 사주며 향을 함께 골라달라고 했다고 했다. 그 마음이 너무 예뻤다. 내가 코트를 입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코트를 입었고, 나를 주고 싶어서 발품 팔 아산 디퓨저도 선물해줬다. 무엇보다 진심을 가득가득 눌러쓴 손편지도 써줬다. 정말 그 사람이 더 예뻐 보였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손편지라니. 5년을 만났던 그 새끼는 단 한 번도 써준 적이 없다. 울면서 떼를 써도 써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 내게 감동을 주고 싶었다며 꼭꼭 눌러쓴 손편지를 선물해주었다. 손편지를 읽는 내내 꼼지락 거리더니 화장실을 한번 더 다녀와야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손편지에는 그의 떨리는 마음이 쓰여있었다.



누나, 안녕하세요? 저 재영이예요. 누나가 손편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편지지를 사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누나. 누나랑 3주? 정도의 시간을 연락을 했네요. 우리가 연락한 지 벌써 그 정도 됐어요. 이제 곧 누나를 만나러 가요. 누나랑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들을 했던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 정말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점점 누나랑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좋았어요. 빨리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만 내내 했던 것 같아요. 내가 마음에 들면 정말 누나가 안아줄까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는 사실 예쁜 사람은 아니에요, 누나가 맨날 말했잖아요. 내가 예쁠 거라고. 근데 나는 예쁘지 않아요. 잘난 것도 없어요. 그렇지만 누나랑 이야기를 하면서 누나랑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어요. 오늘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친구들이랑 동성로를 갔어요. 누나가 좋아한다고 하는 코트를 입으려니 안에 입을 옷이 없더라고요. 맨날 학교에선 체육복만 입고 있었거든요. 근데 누나한테 잘 보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니트를 샀어요. 그리고 누나한테 뭘 선물하면 좋을까 하고 친구 여자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다른 건 처음에 선물하기 부담스럽고, 자취한다고 했으니 디퓨저가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누나한테 물어봤는데, 향수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진짜 많이 고민했어요. 어떤 향으로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분명 향수도 안 좋아하는 거면 강한 향은 싫어할 거 같아서. 진짜 몇 시간을 고민했던 거 같아요.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나도. 얼른 보고 싶어요. 이 편지를 누나가 읽을 때쯤 누나는 떤 표정일까 궁금하네요. 내일 봐요, 누나. 그리고 누나. 나 누나가 좋아요. 만나서도 이 말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만. 안녕.

-재영이가.


편지를 다 읽고 나니, 그가 스윽 왔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앞에 앉더니 슬쩍 내 손을 잡았다. 빨갛게 익은 얼굴로 자꾸 웃으면서 손만 잡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빨개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가 그가 침묵을 깨고 말을 했다.


"누나, 누나랑 연락하는 내내 생각을 했어요. 누나는 정말 다정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좋았어요. 누나랑 연락을 하는 내내 설렜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좋아졌어요. 거의 매일 누나가 퇴근하고 전화하기만 기다렸던 것 같아요. 누나 목소리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어요. 나 누나 좋아하나 봐요."

'어? ㅎㅎ 고마워요. 나도 그랬어요. 나도 기분 좋았어요. 매일.'

"그럼 누나 나랑 사귀어요."

'어? 어어?'

"왜요? 그건 싫어요? 안돼요?"

'에?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누나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근데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가벼운 마음이 아니에요."

'어... 그거 지금 대답해야 해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누나 나 별로구나? 아니면 혹시 누나가 지금 가벼운 마음이에요?"

'어? 아니 아니 그럴 리가요. 나는 그렇게 쉽지 않아요.'

"나도 쉬운 거 아니에요, 쉽게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나 할래요. 남자 친구."

'그래요..ㅎ 딴소리하면 안 돼요.'

"응, 안 해요. 누나 후회 안 할 거예요. 꼭 그렇게 만들어줄 거예요."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그동안 참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을 만났고까지. 숨김없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다했다. 혹시나 나중에 알게 돼서 실망을 하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이야기들로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나는 보통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맺더라도 먼저 오픈을 하는 편이긴 했지만, 정말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 까지 다 털어서 속을 보였다. 나를 다 알고도 나를 만나려고 할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를 다 알고도 나를 만나려고 한다면, 나를 다 알아서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모든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좋다고 했다.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남자 진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꼭 잡은 두 손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처음 만났는데 대뜸 고백을 하는 이 사람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의 손을 잡고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걷기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 너와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