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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밭농부 Sep 09. 2016

우린 늘 非夢似夢으로 산다.

#174.

깨어 있는 것도 아니요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닌

이런 모호한 상태를 비몽사몽이라고 한다.

우린 늘 비몽사몽의 상태로 살아간다.

세상의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아가지만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다니는 노예로 산다.

세상 유일한 존재처럼 잘난 척하고 살아가지만

세상이 조금만 외면하면 외롭다며 울부짖는다.

사랑의 화신 인척 끊임없이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받기만 원하는 감정의 걸인으로 살아간다.

지금의 자신이 옷걸이에 걸린 옷인지도 모르고

언젠가 벗어야 할 그 옷을 높이 쳐들고

"내가 낸데..."라며

소꿉놀이 같은 역할극에 몰입해 산다.

꿈에서 깨어날 즈음

꿈과 현실의 경계 지점을

느껴본 적이 많을 것이다.

그즈음에는 꿈도 알아채고 현실도 알아채며

두 세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순간이다.

혹자는 이 것을 비몽사몽이라 하지만

그 시점이야 말로 진정 깨어 있는 상태다.

오히려 잠에서 깨고 난 이후

우리는 비몽사몽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꿈과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그 상태야 말로

마음의 본래 자리다.

그 자리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고

숨 쉬기보다 쉽다.

탐욕의 어리석은 안경을 벗지 않으면

절대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다.


어떤 때는 세상살이가 소꿉놀이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각 나라의 대통령들이 모여서 서로의 잇속을 뒤로하고

대화하는 것은 동네 소꿉놀이로 보이고.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행하는

어이없는 행동들을 지켜보다 보면

어린아이의 소꿉놀이보다 더 사실적인 소꿉놀이로 보이지요.


이런 소꿉놀이가 재미로만 볼 수 없는 것은

'현실이라는 삶의 터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 때문이죠.

어떤 이는 이 터전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 곳에서 꿈을 키울 수 있으리라 믿고

어떤 이는 여기에서 존재의 가치를 찾기 때문이죠.


이런 존재의 터전을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터 정도로 인식하고

유아적인 발상으로 자신의 탐욕만을 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찌 어리고 어리석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린이는 차분히 설명해 가며 이해시킬 수라도 있지만

이 탐욕에 전 몸만 큰 "기형 어린이"들은

도무지 남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지요.


그럼 이런 "기형 어린이"들은 차치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과도 같이 그들이 만들어 놓은 방식으로 놀아나는

무서운 소꿉놀이에 빠져 살아야만 할까요?

아니지요. 깨어나야 하지요.

꿈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깨어나야 하지요.


자신은 깨어 있다고 믿고

나 만큼만 똑똑하면 속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탐욕의 "기형 어린이"를 향해 걸아가고 있는

"나"를 깨워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 무서운 "기형 어린이"가 될지도 몰라요.

아니 온전한 "기형 어린이"라도 되면

혼자 행복하기라도 하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기형이 되지 못한 기형"으로

후회 만을 남긴 채 삶을 마감하게 되겠지요.


탐욕과 정진을 구분하지 못하고

온당한 방식으로 삶을 살지 못하고

존재 만으로 충족한 내가 되지 못한다면

우린 몽유병 환자처럼 이 생을 떠돌다

당도한 죽음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기형 인생"을 살아 낼 수밖에 없겠지요.


지금의 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꿈에서 깨어나야 해요.

그 탐욕의 꿈에서 깨어나

맑은 몸과 가난한 마음으로

온전한 삶을 당당히 걸어가는

여러분의 삶을 응원하며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마음밭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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