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뜻대로

나는 어떻게 상처받지 않고 사랑할 것인가?

by 정희주

루이스 부르주아는 커플이 함께 있는 장면을 많이 그리고 만들었다. 그중 <가족>은 남성과 여성의 성교장면을 연상시킨다. 성인 남녀의 사랑으로 여성의 몸에는 다른 생명이 탄생되었다. 그림의 내용을 보면 사랑의 과정을 통한 생명의 탄생이지만 이 그림이 계속 불편하게 느껴졌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한 후 성에 대한 억압된 욕망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자신의 삶에 대한 투사였을까? 그림의 장면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림을 계속 볼수록 이 불편함의 정체는 그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투사임을 알았다. 내가 타자와의 관계를 공격과 수동, 지배와 피지배, 소유와 상실 등 이분법적 상황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림 속의 '남성'은 정복하고 지배하고 소유할 수 있는 공격적인 상징으로, '여성'은 침범당하기 쉬운 연약함의 상징으로 보였다.


루이스 부르주아 <가족>, 2007, 종이에 과슈, 개인소장


타자를 알아가는 일은 상처를 입는 일이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상처를 입게 된다. 타자는 나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충돌은 피로 얼룩졌다. 공존보다는 힘의 논리로 억압하고 지배당했다. 나는 자신을 드러내는 공격적인 타자 앞에서 위축되곤 했다. '타자'의 이질성은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에 가능한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무장지대로 도망간 적이 많다. 비무장지대는 진정한 평화이기보다는 무관심의 회색지대에 가깝다. 공존하기보다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 공간이다. 흔히 불편한 문제를 만나게 되면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중요하지 않아."라고 쿨하게 말하곤 한다. 이런 태도는 나와의 차이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소한 문제로 만든다. 혐오가 나와의 차이에 대한 드러나는 차별이라면, 무관심은 침묵의 차별이다. 나와의 차이를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처받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


루이스 부르주아 <임신한 여인>, 2009, 종이에 과슈와 색연필, 개인소장


<임신한 여인>을 보자. 붉은색의 여성의 몸에 푸른색 점이 퍼져있다. 내 안에 이질적인 타자가 서로가 서로를 정복하거나 지배하지 않은 채 공존하고 있다.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 엄마의 몸이 많이 바뀐다. 아이를 위해 몸이 재배치된다. 임신 전에 자궁은 몸에서 가장 마지막에 에너지가 공급되는 기관이다. 평소에는 가장 필요 없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신이 되면 몸은 자궁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공급한다. 아이에게 단백질이 필요하면 엄마는 고기를 먹고, 칼슘이 필요하면 엄마의 치아를 녹여서라도 그 에너지를 가져간다.


처음 임신한 초보 엄마들이 어떻게 아이를 키울지 걱정하면, 엄마 노릇을 오래 해본 엄마들은 장난처럼 이런 말을 한다. "뱃속에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아이가 먹으라며 먹고, 쉬라고 하면 쉬고" 뱃속의 이질적인 타자는 엄마의 몸을 조종하고, 엄마는 그 조종에 기꺼이 응답한다. 사랑하는 아이가 그것을 원하므로.


철학에서 사랑은 "당신 뜻대로"라고 배웠다. 엄마는 이것을 삶에서 배운다. 아기는 자신의 바람에 응답하는 어머니를 통해 사랑을 배운다. 아기에게 이것은 사랑의 원형이 된다. 이들은 지배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사랑을 주고받는다. 이질적은 것에 대한 거부감과 상처에 대한 두려움 너머에는 모성적 사랑이 있다. 사랑은 상처 입지 않는다.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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