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00초 리뷰

혜화역 4번출구에서의 하루

연극 비누향기, 영화 샹치

by 도을 임해성

<도을단상> 혜화역 4번출구에서의 하루.

일요일에 어울리는 행동하기.

맛깔나게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나무늘보처럼 굼띠게 집에서 가장 높은 공간인 침대에서 조심조심 내려옵니다.


아점을 배부르게 먹어줍니다. 원래 브런치라는 것이 아침과 점심을 합친 칼로리를 채워준다는 의미의 무식한 컨셉이기에 그에 걸맞게 계란탕과 볶음밥과 닭볶음국수까지 뿌듯하게 먹어줍니다.


천천히 올라오는 포만감에 젖은 채로 샤워를 하면서 물에 젖어봅니다. 따뜻한 물이 지방을 녹인다는 것에 대한 신앙심과도 같은 믿음으로 충분히 오래 샤워를 해 줍니다.


오늘의 놀이 무대는 혜화역 4번출구.

무료해지기 쉬운 일요일이 무료해지지 않도록 밖으로 나왔습니다만 오늘의 일정은 무료입니다.


연극 보다가 이벤트 당첨된 연극 비누향기. 무료지만 정식 초대권이라 아주 좋은 자리에 앉아 2회차 관람을 했습니다.

20여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1997년과 2021년을 모두 살아본 저는, 20여년 전에 상상도 못했던 기술의 발전과 문화의 변화, 관계의 퇴보를 실제로 목도하는 꿈같은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2, 30년이 지난 뒤에는 무슨 일이 현실이 되어 있을까요. 아마도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되어있을 지도 모릅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엘지유플러스가 주는 선물인 무료 영화예매권으로 샹치를 대학로씨지비에서 보았습니다.

마블의 세계관이나 마블의 히어로물을 보기는 보아도 좋아하지 않는데 샹치는 정말 보기는 보아도 보어링하더군요.


히어로물이 담은 메시지보다 히어로물이 대두되는 시대의 메타포나 컨텍스트를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1930년대 대공황을 배경으로 인기를 얻은 수퍼맨을 필두로 대개 히어로물이 대두될 때의 현실은 매우 데카당스한 우울을 반영합니다. 마블시리즈의 전세계적인 인기는 그들의 세계관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전세계가 비슷한 신경증이나 퇴행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죠.


그러니, 평생을 운이 좋았다고 느끼고 나이먹음을 긍정하면서 50대가 주는 감수성과 경험에 즐거운 저는 마블의 히어로들이 갖는 근거없는 파워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 하는 듯 합니다.


'신체단련과 더불어 마음의 그릇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며 샹치의 아버지 쑤 웬우가 샹치에게 던진 질문이 '영어공부 잘 되어가니?'

정말 뿜었습니다.

샹치 우라우! ㅋ

샹, 치우라우! ㅋㅋ 어디서 되도 않는 싸구려 영어제국주의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번출구연극제, 어느날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