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을단상] 맑고 향기롭게 살기

길상사에 낭창거리는 봄이 오고

by 도을 임해성

[도을단상] 맑고 향기롭게 살기

대학로에 나갈 때면 간혹 길상사에 들릅니다. 성북동 부촌에 내리는 봄볕과 으리으리한 집이 들어 선 경계면으로 굽이치는 골목길을 따라 물신의 아룸다움에 취해 허우적 허우적 언덕을 오르다 보면 어느덧 무욕의 땅, 길상사에 이릅니다.

영한으로 나서 기생 진향이 되었다가 백석의 사랑을 얻어 자야로 불리고 나타샤로 시가 되고 길상화로 죽은 여인이 기꺼이 내어 준 고급요정이 그 당시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여 술집이 절집이 되었습니다.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에 범종이 울리고, 부어라 마셔라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거야라며 호기롭게 술잔을 들이키던 곳이 선 채로 극락전이 되고 술냄새 담배냄새 자욱하던 방마다 선방이 되어 향냄새가 은은합니다.

대원각일때 한 번 못 와본 것이 아쉽기는 허나, 중력을 거슬러 담벼락을 붙들고 기어오르다 말라붙은 담쟁이 덩굴이며, 담장 위로 가뭇없이 떨어져 삭아 비틀어진 나뭇잎이며 나뭇가지들이 뿜어내는 흑갈색 허무의 파노라마를 따라 바스라지는 물욕의 사체들을 수습하며 걸었습니다.

1997년 절집을 열 때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하였다고 하네요.

범종 소리 속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듣고, 극락전 독경 소리 속에서 운울 띄우며 시를 읊는 소리를 듣고, 선방의 적막 속에서 숨이 막히는 절정의 신음을 듣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시간 여행 속에서 1997년부터 2026년까지 30년의 세월이 흘러 저도 희끗 머리가 세었습니다.

봄 비가 내리는 아침입니다.
차향이 어울리겠으나 커피 한 잔 내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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