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을단상] 기저질환자의 점심

도을이 풀 뜯어먹는 소리

by 도을 임해성

[도을단상] 기저질환자의 점심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두근거림은 미지의 것에 대한 약간의 불안과 새로운 것에 대한 미량의 두려움 같은 것들이 뒤섞인 파장이 뿜어내는 진동일 것입니다.

그렇게 3고 질환에 대한 경고가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바뀐 것은 턱의 퇴화랍니다.
굳고 정연한 결을 따라 고기를 찢고 씹어대던 도을의 강인한 턱은, 요즘은 무르고 여린 푸성귀와 삶은 계란이나 오이와 사과, 바나나 등으로 채워지기 마련이어서 금방 어젯밤에 게걸스럽게 고기를 물고 뜯은 육식남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식탁 앞에 조신하게 앉아 커피를 기다리는 초식남이 되어버립니다.

가장 먼저 먹는 것은 달걀입니다. 제가 본디 육식남이었다는 태고유형에 대한 기억이자 다시 돌아가야 할 곳에 대한 지향의 의미를 담아 이 번 끼니의 처음이지 마지막이 될 단백질을 음미합니다.
그 다음엔 바닥에 깔린 상추를 밥으로 삼고 위에 놓인 당근이며 오이며 토마토며 사과를 토핑된 반찬 삼아 상상력 훈련을 하면서 우직하고도 묵묵하게 씹기를 반복합니다.

섬유질에 대한 충성심이 증명되고 나서야 비로서 작은 빵 한 조각이 주어집니다. 을녀의 설탕이 들어간 커피 향을 맡으면서 동시에 도을의 무가당 커피를 마셔야 과거의 영광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칫 울컥 무너졌을 지도 모르는 고고한 육식남의 품위를 지키는 드링킹을 시전하며 작은 떨림으로 빵을 조금 찢어 입에 넣으면 그 속에 떠도는 단맛을 찾아 혀가 미쳐날뜁니다.

태극당 슈크림 빵이라 마침내는 달달한 크림과 만날 것을 알지만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건하게 빵의 바깥 부분의 오로지 순결한 밀가루 가운데 임재하시는 단맛을 조신하게 오물거리지요.
그리고 마침내 영접하는 슈크림의 폭죽! 놀란 혀를 다독이기 위해 급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하~아.

일용할 양식을 얻었으니 이제 에덴에 있을 때처럼 노동을 모르는 몸이 되어 놀아야 합니다. 오늘의 동선을 머리 속에서 다 정리했습니다.
그니까, 이제 나가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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