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여진 희곡으로 엮어내는 실존에 대한 유쾌한 해설
[연극] 대학로 추천연극 거기 서 있는 남자 관람 후기...잘 쓰여진 희곡으로 엮어내는 실존에 대한 유쾌한 해설
대학로 4번출구를 나와 GGV대학로를 돌아 나가면 대로변에 한성아트홀이 있습니다. 매우 실험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올리는 극장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몹시 추워진 밤공기를 가르고 입김을 내쁌으면서 30분 전에 한성아트홀로 들어섭니다. 오늘은 제가 친구를 초대해서 같이 보기로 한 날이라 먼저 티켓팅을 하기 위해서 좀 일찍 도착을 했습니다.
거기 서 있는 남자라는 제목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습니다. 죽어야 사는 남자라는 연극에서는 발기된 상태의 남자가 나오는데 그 발기상태가 죽어야 사는 남자라는 다소 황당하지만 웃기는 소재를 가지고 연극이 진행되거든요. 그런 작품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에게 '거기 서 있는 남자'라는 제목은 엉뚱한 생각을 하기에 충분한, 너무 도발적이면서 너무 직설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하면서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답니다. ㅋㅋ거기 서 있는 남자라니..
모두 4개조의 캐스팅이 있나봅니다. 오늘은 맨 위에 있는 이의령, 박지은 두 배우가 주인공이네요. 가만히 들여다 보니 서로 잘 어울리는 조합으로 캐스팅을 한 것 같지 않아보이더군요. 외모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 암튼 뭔가 서로 잘 안 어울리는 사람들끼리 일부러 짝꿍을 시켜놓은 것이 아닌가 싶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들더군요.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어울리는 무대였습니다. 나뭇잎하나 매달려 있지 않는 나무들과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낙엽들과 어울리지 않게 놓여진 벤치.
짙은 어둠 속에서 등산을 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연극은 시작됩니다.
남자가 인적이 드문 산길을 걷다가 큰 비에 쓸려내려온 '지뢰'를 밟는다는 설정으로 극은 시작됩니다. 그것이 정말로 지뢰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자가 그것이 지뢰라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죽음의 목전에서 살려달라고 외쳐댑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그 외진 곳에서 외침소리에 놀라 달려온 여자가 하나 있습니다. 심장병이 있는 엄마를 모시고 산 속에 둘이만 살고 있는 여자. 그리고 지뢰를 밟고 선 남자. 그들은 그렇게 만났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구조를 요청해 줄 것은 요청하고, 여자는 심장병이 있어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엄마를 두고 길을 나설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수퍼맨으로 만들어주는 스마트폰은 신호연결이 안 되고 배터리가 방전됨으로써 우리가 그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음을 아주 강력하게 호소합니다. 아니, 우리가 아니라 그 남자가 아주 돌이킬 수 없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있고, 스마트폰이 없으면 여자도 마을까지 내려가야 하는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심장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엄마를 돌볼 수없다는 절실한 상황 속에서 남과 여는 애원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하면서 각자의 입장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발을 뗄 수가 없다는 단 하나의 제약은 모든 것을 통제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언제나 여자가 남자를 걱정하여 찾아오는 때에만 단속적으로나마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다시 큰 비가 내리자 남자가 걱정이 된 여자가 다시 남자를 찾아옵니다. 그러다가 그만 비에 씻겨 내려온 지뢰를 여자도 밟게 되지요. 여자가 남자에게 퍼부었던 온갖 비난을 남자가 퍼붓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둘 다 움직일 수 없는 상황. 그 때 심장병이 걸린 엄마가 흔들어대는 호출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여자는 엄청난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어찌할 수 없는 엄마에 대한 애정 속에서 고민하다 마침내 과감하게 발을 떼어냅니다.
지뢰가 터졌을까요...잠시 후 그녀가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에게 달려갑니다. 아마도 불발탄이었나 봅니다. 그것을 본 남자는 자기도 할 수 있다며 입술을 깨물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하면서 발을 떼어내려는 시도를 해 보곤 합니다만 끝끝내 발을 떼어내지 못 합니다. 난 못해..난 못해..그렇게 그는 중얼거리면서 간신히 자기 앞에 던져진 삶의 끈을 부여잡는 것으로 자신의 선택을 공고히 합니다.
이제 할 수 없이 남자가 서 있는 공간이 그대로 삶의 터전이 되어갑니다. 여자가 음식을 해다 주기도 하고, 속옷을 가위로 잘라 갈아입히고 옷을 빨아주면서 나무 사이에 빨래 줄이 걸리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여자가 뜨개질을 하기도 하고, 어느덧 해먹과 텐트까지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겪게 되지요. 그러는 동안에도 심장병이 도져서 코마 상태에 빠진 엄마는 아직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이 압권입니다. 지뢰를 밟고 선 지 3년이 되었다며 여자가 특식을 만들어다 남자에게 먹이려고 합니다.
맛난 음식을 받아 안으며 남자가 묻습니다. "장모님은?"
여자의 엄마를 장모라고 부르는 순간 빵 터졌습니다. 이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놀라 달려간 여자가 어린 아기를 안고 나옵니다.
무엇 때문에 거기 서 있는 지, 밟고 있는 무엇이 그리 삶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지, 무엇이 겁나서 한 발자욱 내딛어 선 자리를 떠나지 못 하는 지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안 해주고는 뻔뻔스럽게 그래도 거기서 삶이 계속된다는 모습을 그리면서 극이 끝나네요. 그렇게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일까요.
그렇게 모질고도, 끈질기게..? 그러나 그 속에도 웃음을 터뜨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