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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Apr 27. 2024

암을 받아들이다

내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


복수가 찼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병원에 가서야 알았다. 나는 다만, 몇 달 전에도 있었던 빈뇨증상과 배 안의 어딘가가 좀 부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만 받고 있을 때다.  


비뇨기과에 가서 염증검사를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1주일을 지켜본 후 산부인과를 갔다.  느낌상 자궁이 부어있는 것 같아 원래 알고 있던 선근증이 악화됐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방문이었다.   바로 그날, 산부인과에서 자궁은 문제가 없고, 복수가 찼다는 이야기를 듣고 CT를 찍으러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늘 찍을까? 다음 주에 찍을까?를 고민할 정도로 나는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

당일에 ct를 찍을 수 있다는 병원을  찾아 간신히 ct를 찍고, 검진의가 ct결과를 다음 주 월요일에 보자고 하길래 이번엔 물러서지 않고 복수가 찼는데 이틀을 기다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제야 배를 만져본 의사가 위급하다고 봤는지 당일 결과를 보자고 해서 또 기다렸다.  그제야 남편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ct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처음 진료를 해줬던 의사는 퇴근하고, 같은 병원의 다른 의사가 ct결과를 알려줬다.  때 마침 도착한 남편과 함께 결과를 듣는데, ct결과와 여러 임상경험들을 종합했을 때 "전이된 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전이된 암이라는 단어가 너무 생소해 사실 믿기지가 않았다.  뭔가 잘못됐을 거라는 생각, 의사들은 뭐든 과장해서 이야기하기 좋아하니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전이된 암"이라는 단어는 내 몸에 들어오지 않고 튕겨 나갔다.  그러나 남편은 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주차장에서 눈물을 쏟았다.  "나와 J에게는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절규했다. 나도 그제야 조금 무서워졌다.

ct결과를 알려준 의사는 다른 상급기관으로의 진료를 빠르게 연계해 주려고 애를 썼다.  고마웠다.  비록 연계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애를 써주는 모습 그 자체에 위로를 받았다.  의사는 하루라도 빨리 진료를 받아야 하니 어떻게든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우리도 그러겠노라 하고 했지만, 대학병원 응급실 진입은 험난했다.  하필 전공의 파업까지 겹쳐, 내가 가진 소견서(전이된 암)로는 대학병원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되고, 친절한 2차 병원은 복수천자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토요일 하루 꼬박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일요일 다시 한번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보기로 했다.  응급실은 베드를 배정받기 전에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는데, 환자분류실이다.  이미 여러 번 거절당했기에 마음을 졸이며 면담을 진행하는 데, 이번엔 배드번호가 부여됐다.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일단 병원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안도가 됐다.

그렇게 외래로 시작됐으면 족히 일주일은 걸렸을 응급처치와 검사들을 하루이틀 사이에 진행했다.  주치의는 최초 ct를 보고 얼굴을 볼 때마다 "암"일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암이면 이렇게 아프지 않을 수 없고, 검사 때문에 힘든 것 외에는 크게 다르지 않은 내 상태를 더 신뢰했다.  통화가 된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옆에서 남편은 이미 복막암과 난소암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아냈다.  우리나라 최고의 의사가 국립암센터에 있고, 그 의사가 나온 영상은 모조리 찾아보며 병원을 옮겨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런 말들도 귓등으로 들었다.  남편의 말들이 귀찮았다.


그러던 중, 친한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는 잠자코 ".... 어때? 괜찮아...?"라고 물었는데,  나는 무심결에 "무서워"라고 말했다.  "언니 무서워... 아빠처럼 될까 봐 무서워"라고 말했더니, 언니는 목놓아 함께 울어 주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몹시도 무서워한다는 것을,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겪을 통증과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확실히 알았다.  언니와 통화를 마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수많은 암환자들의 영상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아버지의 고통을 내가 겪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나의 시나리오에는 오직 통증에 시달리며 매 순간을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던 아버지의 마지막 여정만이 있었다.  안개처럼 서려있던 '무서움'을 알아차리니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옅어졌다.  '그래 그거였구나..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라' 하는 마음이 생겼다.


 조직검사를 하고 4일째 되는 날 결과가 나왔다.  주치의는 여러 번 말한 것대로 현재 상태는 '복막암 3 or 4기'라고 했다.  복막암은 난소암과 관련성이 높은데, 현재 확인된 것은 원발성 복막암이고, 수술을 할 수 없으니  항암치료를 바로 시작하자고 했다.   남편은 이미 전원 할 병원에 외래 예약을 해놨고, 수술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놨다.  이번에는 남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나 이제 해볼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  나도 암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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