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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Nov 25. 2022

배려의 동의어는 차별

상대적 박탈감


“여기는 여자 손님하고 남자 손님 돈가스 양이 다르대요!”

“남자 손님한테 더 많이 줘요?”


몇 년 전,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명 식당을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에 나온 장면입니다. 돈가스로 유명한 그 식당은 남자 손님에서 훨씬 더 큰 크기의 돈가스를 제공했지요. 그리고 그 장면을 본 MC는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세심한 배려네요.” 정말 이것은 배려일까요?


얼마 전 우연히 이 장면을 보고,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인 저는 남자인 신랑보다 훨씬 더 많이, 빠르게 먹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부부가 그 식당에 갔다면 저는 신랑의 그릇을 제 그릇과 바꿨을 겁니다. 그리고 왜 나는 적게 주느냐고 항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심리일까요?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붕어빵 가게가 하나둘씩 눈에 띕니다. 이날을 위해 주머니에 현금을 꼬깃꼬깃 챙겨둔 저는 이천 원에 붕어빵 세 마리를 주문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온 손님은 붕어빵 사천 원어치를 주문했고, 제 뒤에 온 손님은 붕어빵 이천 원어치와 꽈배기 이천 원어치를 주문했습니다.


이제 막 빵틀에 반죽을 부은 상황이라 우리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먼저 나와 있던 꽈배기를 포장하던 주인은 뒤에 손님에게 말했지요. 오래 기다리셨으니 꽈배기 하나를 더 넣어드릴게요. 그 손님보다 더 오랜 시간 기다린 저는 내심 기대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온 손님의 노릇노릇한 붕어빵이 봉지에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은 또 말했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으니까 붕어빵 하나 더 넣어드릴게요. 설레는 마음으로 저는 제 붕어빵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제 손에 쥐어진 것은 고작 붕어빵 세 마리였습니다. 희망은 붕어빵 속의 팥처럼 시커메졌지요.


사실 제가 실망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세 마리를 주문했고, 세 마리의 값을 치렀고, 세 마리를 정당하게 돌려받았으니까요. 그런데도 기분이 나빴습니다. 왜일까요? 인간의 만족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같은 노력을 하고 합당한 대가를 돌려받는다면 누구나 만족합니다. 하지만 상대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린다면 어떨까요? 타인이 더 받았다는 것은 내가 덜 받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음에도 마치 빼앗긴 것과 같은 부당함을 느끼게 되지요.




연예인의 삶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리얼 예능 프로가 대세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프로그램은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였는데요. 유명인이 실제 사용 중인 냉장고를 스튜디오로 그대로 옮겨와 보여주고 그 안에 있는 재료로 요리 대결을 하는 프로였지요.


이슬만 먹고 살 줄 알았던 가수의 냉장고에 먹다 남은 치킨이 있고, 깔끔한 이미지를 자랑하던 배우의 냉장고에 곰팡이 핀 과일이 있을 때 시청자들은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구나,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매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소소한 즐거움으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더 자극적인 장면을 추구하게 되지요. 평범한 삶을 보여주는 연예인은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초호화 재료가 가득 찬 냉장고가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한 스푼에 몇만 원을 호가하는 캐비아를 계란 프라이에 토핑으로 먹는 모습을 보며 시청자는 또 다른 흥미를 느꼈습니다. 국내에서 절대 구할 수 없다는 특별한 향신료가 갤러리처럼 정렬된 모습에 감탄도 했지요. 이런 자극이 주는 즐거움은 오래갈 수 있었을까요? 


화장기 없이 부은 얼굴로 아침을 맞이하거나 떡진 머리로 시작되던 누군가의 일상은 누가 누가 더 크고 화려한 집에 사는지 경쟁하는 것처럼 바뀌어 갑니다. 순수한 아이들의 에피소드를 보여주던 육아 예능 프로그램도 얼마나 더 좋은 교육과 문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지 내기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누군가의 냉장고가 호화로워지고 누군가의 일상이 사치스러워질수록,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에게, 내 가족에게 줄 수 없는 무언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되는 것을 보면 부러움은 질투의 씨앗이 되고 미움의 열매로 자라납니다.


인간은 비교의 동물이고,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나를 정의합니다. 그래서 동질감을 느끼면 편안해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아간다고 느낄 때, 나의 삶이 보편적이라고 느끼고 안정감을 찾습니다. 그러니 유명인의 평범한 일상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은 만족감을 느낀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그들만 사는 세상”의 사람이라는 현실을 직면하면 어떻게 될까요? 


비교의 동물인 우리는 다시 비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와 열을 가리기 시작하지요.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기준을 내가 아닌 상대로 잡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준이 된다면 나보다 특별한 사람을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기준이 된다면, 타인의 삶이 보편적인 조건이 되고 나의 삶은 그에 비해 열등하게 판단되는 것이지요.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결국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더 바라보게 되고 불만이 생기고 분노하게 됩니다. 상대적 박탈감 Relative Deprivation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식당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MC는 남자 손님에게 더 많은 양의 음식을 주는 식당의 배려를 세심하다고 표현했습니다. MC는 물론 남자였지요. 그에게는 세심한 배려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MC가 여자였을 때도 그것을 세심한 배려라고 말했을까요? 부족한 사람은 누구든지 조금 더 많이 주겠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배려의 사전적 정의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돕고 보살피기 위해 누군가는 아파야 한다면 이것은 올바른 배려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속상했던 기억을 털어놨습니다. “저는 첫째라서 항상 참아야 했어요. 우리 엄마는 제가 형님이니까 이해하라고, 먼저 사과하라고, 또 동생을 챙기라고 하셨죠. 저는 시간이 지나도 그것이 늘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어요. 저도 아직 아이였는데 말이지요.” 


잘못된 배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은 이럴 것이다, 하는 예단에서 오는 사고방식이지요. 고정관념은 편견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 편견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바로 차별이라고 부릅니다. 잘못된 일반화와 예단은 누군가를 배려함과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를 차별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배려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차별이 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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